나의 할머니
작년부터 제주 올레 걷기를 시작했다. 대략 달에 한번 정도 가서 하나의 코스를 걷고 온다. 하루에 걷는 시간은 대략 4~5시간, 거리로 치면 짧게는 9킬로에서 길게는 21킬로 정도를 걷는다. 평지일 때도 있지만 울퉁불퉁 현무암이나 동글동글한 돌들 가득한 바닷길을 걷기도 한다. 하늘이 보이는 얕은 숲길이나 무서울만큼 한적한 길도 걷는다. 혼자 걷기도 하고 둘이 걷기도 한다. 마을이나 밭을 거쳐가기도 하고 산(오름)도 걷는다. 때로 뜨거운 햇빛 속을 하염없이 걸어야 하고, 비나 눈이 오기도 한다. 제주의 바람을 견디며 걷다 보면 인생도 이토록 다양한 순간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터벅터벅 걷다 보면 때로 기운이 빠지고 지칠 때가 있다. 흔히 당 떨어졌다는 말이다. 이럴 때를 위해 내 가방 속에는 언제나 사탕과 초콜릿이 들어있다.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주머니에도 언제나 사탕이 들어있었다. 할머니의 사탕은 바쁜 자식들을 대신해 키워주던 손자 손녀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당신의 당이 떨어질 때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할머니 댁은 수원 화서동이다.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릴 적 우리 형제들은 대구와 수원을 자주 오고 갔다. 국민학생이 되어서는 방학이면 어김없이 갔다. 지금이야 도시화되어 흔적 조차 남아있지 않는 집이지만 당시만 해도 마당에 우물이 있는 지붕 낮은 초가집이었다. 지푸라기로 불을 떼 가마솥에 밥을 지었던 부엌이 있었고, 집 뒤로는 원두막이 딸린 과수원도 있었다. 어린 우리들에게 언제나 좋은 곳이었다.
할머니 댁에는 언제나 서울사는 사촌 동생들이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고모를 대신해 할머니는 사촌들을 양육했다. 일 때문에 어린 자식을 곁에 두지 못하고 부모에게 맡긴 큰 고모는 언제나 미제 초콜릿이나 과자 그리고 사탕과 같은 간식을 잔뜩 사다 날랐다. 안방 벽장에는 언제나 먹을거리가 그득했다.
할머니는 키가 크셨다. 멀리서 봐도 다른 할머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하늘빛 한복을 입으면 항상 허리에 끈을 질끈 묶었다. 걸음걸이마저 씩씩해서 거침없는 여성이었다. 그 시절 농부의 아내가 다 그렇듯 다소 까맣게 그을린 얼굴빛에 가늘고 작은 눈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흘깃거릴 때도 있는 눈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웃어주던 눈이었다. 가족 모두가 모여 먹는 아침 상 옆에 이불을 돌돌 말아 누워 늦잠을 자도 한결같이 웃어주던 분이셨다. 나는 할머니가 좋았다.
내가 줄곧 할아버지라 알던 분은 할머니의 두번째 남편이었다. 아기 때부터 날 안아준 할아버지였지만 굳이 따지면 친할아버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할머니는 첫 번째 결혼으로 내 아버지를 낳고, 남편이 죽자 어린 아버지를 데리고 다시 시집을 가셨다. 그래서 나에게는 성이 다른 두 명의 삼촌과 두 명의 고모가 있다. 이제는 늙어 버린 큰 고모는 깜빡 깜박할 때도 있지만 여전히 건강하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혼자 있는 조카가 불쌍한지 자주 전화를 주신다. 할 일이 바빠 전화를 받지 못해도 줄기차게 걸어주신다.
할머니는 1918년생 말띠이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만으로 103살이고, 1995년 만 7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1918년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스페인 독감으로 2,00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그 속에서 힘겹게 태어난 여성의 삶이 어떠했을지 쉽게 상상할 수는 없다. 다만 듣고 남은 기억을 토대로 할머니의 삶을 추측해볼 뿐이다. 할머니가 나고 자란 고향이 어딘지, 언제 결혼을 했는지, 어떤 사연으로 두 번의 남자를 만나고, 자식을 낳아 어떤 맘으로 기르고 살았는지 전혀 모른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자신의 아버지(내겐 진짜 할아버지건만 만나본 적 없으니 부르기 조차 어색하다. 남아있는 사진 정도의 거리가 있는 할아버지)는 경기도 용인에서 양조장집이라고 불렸던 경제적인 여유가 있던 집안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그런 양조장집 아들에게 할머니는 시집을 갔고, 딸도 아들도 낳았다. 딸은 아파 일찍 죽었고, 아들만 남았다. 남편은 여유 많은 돈으로 밖으로만 도는 한량이었다. 바깥세상을 제 집 삼아 살던 남편이 어느 날 객사하고 할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데리고 수원의 한 남성에게 다시 시집을 갔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얼마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여성 혼자 자식을 키우기 어려울 만큼 곤란했으며, 과부가 되어 외동자식을 키우는 삶조차 쉽게 허락되지 못할 그런 분위기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재혼한 남편에게는 이미 한 명의 딸이 있었다. 나의 큰고모이다. 건강한 할머니는 자신의 첫 아들과는 성이 다른 한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을 또 낳았다. 다행스럽게 할머니는 두 번째 남편과 오래오래 살았다. 자신의 첫아들이 낳은 2남 1녀를 비롯해 많은 조손을 안아보고 돌보며 살았다. 내가 20대가 될 때까지 할머니는 무릎 관절염이 고질이기는 했지만 가끔 대구로 오기도 하고 우리가 가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았다. 그러다 어느 겨울날 남편보다 먼저 흙으로 돌아가셨다. 팔십 년 가까운 여성의 삶을 결혼과 출산 그리고 양육만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20대의 고민에 빠진 내게 여전히 늘 웃어주던 어른이었고, 장구 치는 사진 속 씩씩하고 흥겨운 할머니였다. 그분이 살면서 어느 순간에 힘이 빠지고 외롭고 쓸쓸해졌을지 상상할 수 없다. 할머니의 주머니에 언제나 가득했던 사탕들이 할머니에게 과연 위로가 되었는지 다시 살아갈 약간의 힘이라도 주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할머니를 만나 물어보고 싶은 얘기가 많다.
할머니에게는 아픈 손가락이었을 내 아버지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외로움이 절절하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몸을 주신 아버지는 어린 시절 객사했고, 키워준 아버지는 성이 다른 의붓 아버지였다. 같이 놀며 성장한 형제들과도 성이 달랐다. 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살폈고, 때문인지 성공에 대한 집착도 많았다. 주머니에 돈이 많으면 도를 넘는 거드름을 피우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맏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커서 항상 이복 여동생과 씨 다른 동생들을 돌보려고 노력했다. 그런 아들을 보며 할머니의 마음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할머니에게는 아버지 만큼 아픈 손가락이 또 하나 있었다. 지금은 유방암으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나의 둘째 고모이다. 대학생이 되어 특수교육을 배우고 나서 나는 둘째 고모가 지적장애라는 것을 알았다. 할머니 댁에 가면 고모는 항상 우리랑 같이 놀았다. 어린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봄이면 냉이를 캐러 가고, 더운 날에는 우물의 물을 길어 씻겨 주었다. 밥도 해주고 수박도 잘라주고 같이 잤다. 할머니가 시키는 일을 곧잘 했지만 학교는 가지 않았고 우리는 그 이유를 몰랐다.
어느 날 할머니와 작은 고모 그리고 나 세 명이 목욕탕에 간 기억이 선명하다. 나는 어렸지만 고모는 이미 과년한 처자였다. 고모는 어린 나를 꼼꼼히 씻겨주었다. 고모는 밥도 잘 먹었다, 그래서인지 늘 배가 불러보였다. 목욕탕에서 벗은 고모의 배는 내가 보기에도 살이쪄 보였다. 할머니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당시 고모는 아빠도 모르는 아이를 임신했고 거의 산달이 가까운 상태였다고 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먹는 걸 좋아하는 반푼이 딸이 살이 찐다고만 생각했지 임신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어른이 되어 나는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그런 기억이 있는데 맞느냐고, 엄마는 그때 고모는 결국 아이를 낳았고, 낳자마자 입양을 보냈다고 했다.
내 엄마에게도 고모는 늘 골치거리였다. 맏아들로서의 과도한 책임감을 가졌던 아버지는 동생들을 수시로 대구로 불렀다. 엄마의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으로 고모와 같이 산 적도 있다. 그러나 고모는 엄마의 지갑이나 저금통의 현금에 수시로 손을 대고, 집안일을 한다고 했지만 언제나 엄마가 뒤처리를 해야 했다. 자신의 오빠인 내 아버지는 무서워했지만 올케인 엄마에게는 수시로 시누이 노릇도 했다. 지적장애가 뭘 알고 그랬을까 할지 모르나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엄마는 아마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할머니 세대의 엄마라면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모자라는 딸이라는 걸 알지만 결국 시집을 보냈다. 고모는 두 딸을 낳았고 엄마로 아내로 살았다. 심하진 않았지만 지적장애였던 고모가 그 복잡한 인생을 잘 살았을 리 만무했고 언제나 딸의 크고 작은 집안 내외의 사고를 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할머니였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애가 타고 절망했었을까.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 고통을 해소하며 살았을까.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도토리 묵은 항상 맛있었다. 도토리 어디서 주웠냐고 물으면 시골서 주웠다고 했다. 할머니집도 시골인데 또 시골이 어딘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슬프고 막막할 때 하늘빛 한복을 갈아입고 허리에 끈을 질끈 매고 버스를 타고 할머니의 시골로 가셨던 것일까. 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을 걷다 상수리나무 아래 떨어진 도토리들을 잔뜩 줍다가 하늘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을까. 치마폭에 잔뜩 담긴 도토리들로 마음이 진정되었을까. 도토리를 들고 와 껍질을 까고 삶고, 삶은 물을 내려 다시 끓이며 타오르던 아궁이의 불은 할머니의 아픔을 알아주었을까. 그때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손끝에 닿던 사탕 봉지의 바스락 거림에 웃었을까 울었을까. 사탕을 까서 천천히 까먹거나 깨물어 먹으면 사탕은 할머니의 당이 되어 다시 힘을 주었을까. 부디 그랬기를 하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