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언제부턴가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투미한 다른 이가 있다. 내가 분명한데 내가 아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씻고, 거울을 본다. 아직 물기가 남은 피부 이건만 촉촉하다는 느낌이 적다. 지난밤 눌린 베개 자국은 회복이 더뎌서인지 그대로 남아 있고, 어제의 피로도 멍한 눈동자로 남아있다. 눈 아래가 내려앉고, 입가엔 나이선이 진하다. 입술은 바삭거리고 붉은 빛깔은 흔적도 없다. 어휴!
감추기 위한 화장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바르지 않을 도리는 없다. 나름대로 열심히 발라본다. 칙칙하던 피부색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눈썹털이 적은 것은 유전자의 탓이다. 피부색이 맑은 나이에는 눈썹털이 적은 것도 그저 봐줄 만하더니 이제는 제대로 그려 넣지 않으면 아파 보인다. 거울 속의 낯선 이가 애잔하다.
시간은 참으로 공평하다. 나이도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비슷한 숫자를 이름표 마냥 달고 사는 이들의 얼굴이 비슷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구나 비껴갈 수 없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의 흔적을 그저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가 된 것이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얼굴이 괜찮을 때가 있었다. 아파서 먹지 못한 채 며칠을 보낸 수척해진 얼굴이 오히려 더 이뻐 보인다는 얘기를 듣던 시간도 있었다. 그로부터 멀리 왔다. 모두가 그렇듯 내 앞의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그 시간 속에 뛰어들어 열심히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사라질 수 없는 이름처럼 숫자는 점점 커지고, 해야 할 일이나 주어진 책임이 커졌다. 하루하루를 매달 매해를 멈추지 않는 열차를 탄 것 마냥, 바람 속에 하염없이 흩날리는 이파리마냥 달려왔다.
시간은 절대 뒤로 가지 않는다. 내 마음이 앞으로 가지 못하고 혼자서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거울 속의 얼굴에는 지난 시간의 내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순수한 모양새로 엄마의 보호를 벗어난 이후 지금까지 통과해 온 시간의 흔적이 훈장처럼 때로 상처처럼 남아 있다.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월의 무게만큼 나이가 들고 바래지고 주름진다. 상인지 벌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마음만은 여전히 이팔청춘이다. 웬 늙은이 같은 말인가 하겠지만 거울 밖의 나는 맘 여린 소녀이다. 나뭇잎 굴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깔깔대는 사춘기 소녀라고 까진 할 수 없다. 하지만 날리는 벚꽃잎에 마음이 흔들리는 봄날같은 마음은 여전하다. 사방이 밝은 꽃들이 날리는 마음을 가진 내가 겨울 같은 거울 속의 나를 마주 대하면 매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라 하지만 쉽게 그 얼굴에 칭찬을 해주지 못한다. 가끔 방치하고 외면하기도 한다.
이것이 지금 내게 주어진 숙제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 늙어가는 몸과 얼굴을 한 나 자신을 반듯하게 잘 수용하는 일. 오래된 내 얼굴에 남은 흔적을 기꺼이 칭찬해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한가닥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이 나의 숙제인 것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어느 날 갑자기 검은 머리채 속에 반짝이던 새치 한가닥에 놀라 가슴이 설렁해졌던 것처럼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새 것은 깔끔해서 좋다. 시간의 때가 묻은 것들이 주는 아름다움도 한편 있다. 수백년 묵은 팽나무의 모습이 그렇고, 오래된 한옥의 묵직하고 편안한 그늘이 그렇다. 박물관 한편에 고고히 자리한 백자가 그렇고, 미술관의 손 때 묻은 오래된 그림일수록 더욱 찬사를 받는 것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오랜 시간 동안 마주치는 바람과 먼지를 견디고, 세월을 건너온 것들에는 그것이 건너온 시간의 흔적이 상처로 때로 고통으로 남아있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거기에 가치를 주고 사랑하고 아낀다.
거울 밖의 내가 거울 속의 나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다. 거울 속의 내가 말한다. 나의 마음인 네가 있는 그대로의 얼굴을 받아주지 않아 그것이 나를 주름지게 한다고. 마음과 몸이 정답게 어울려 모듬살이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많은 시간을 함께 건너가기 어렵다고.
거울 속의 얼굴은 표정만 지을 뿐 정작 소리는 없다. 그저 그 표정만이 좁은 거리를 휘청이다 흩어져 갈 뿐이다. 거울 속의 나는 굳이 큰 소리로 소리치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 다시 토요일 출근 준비를 한다. 거울 속의 나는 변함없이 그대로다. 그것을 만져보는 내 마음도 여전하다. 어떻게 하면 함께 잘 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거울 속의 나에게 던져본다. 여전히 거울 속의 나는 표정만 지을 뿐 대답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