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DDG, 내게 쓰는 편지
COVID-19로 온 세상이 어수선하던 작년,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은 올레 블로그에 <길 위에서 전하는 편지>라는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올레의 모습, 그 스펙트럼이 다채롭듯이 올레를 걷는 사람들의 사연이나 이유도 저마다 달라 본인이 만난 올레꾼들의 이야기를 편지로 썼던 것 같다. 보내는 사람은 서명숙, 수신자는 제주 올레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첫 번째 편지가 작년 8월 3일에 발송한 것인데 벌써 열여섯 번째라고 하니 참으로 사연이 많구나 싶다.
열여섯 번째의 편지에는 내가 살짝 등장한다. 때문일까. 편지글을 반복해 읽다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내게 붙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프롤로그
'제주 올레'를 처음 걸었던 것은 2011년 겨울이었다. 교직원 연수가 제주에서 있었고, 올레 7코스를 걷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걷기 좋은 날씨에 운동 삼아 동료들과 천천히 걸었다. 외돌개를 출발해 법환포구에서 김밥을 먹고, 강정마을 근처 노점에서 막걸리도 마시며 하루를 꼬닥꼬닥 놀멍 쉬멍 걸었다. 기분 좋은 하루였다.
2019년 12월, 새해맞이를 준비하던 중 문득 제주 올레가 떠올랐다. 힘든 고비를 넘기고 집으로 온 엄마는 침대에 누워있었지만 다행히 매일 조금씩 건강해지고 있었다. 잃어가던 언어가 회복되고, 식사도 조금씩 스스로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행복한 날들이었다. 겨울 추위에 다시 아프면 어쩌나 전전긍긍했지만 고마운 분들의 보살핌 덕에 우려했던 일들이 없던 평온한 12월이었다. 마음의 여유는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했다. 거기에 제주 올레 걷기가 들어 있었다. 때마침 건강 때문에 오랜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친구가 곁에 있었다. 함께 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새로운 다이어리에 2020 <올레 걷기>를 써넣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아픈 엄마와 살며 장거리 출퇴근을 해야 하는 처지였고, 친구는 건강 때문에 무리한 운동을 하면 안 되는 형편이어서 한 달에 한번 무리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당일치기나 1박 2일 정도로 걷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 일이어서 어떤 일들이 생길지는 알 수 없었다. 걷다 보면 요령도 생기겠거니 했다. 낯설지만 설레고 행복했다. 급한 마음에 날짜도 정해놓지 않고, 무작정 두 개의 올레 패스포트와 안내서를 사서 친구와 나누었다
세상 일은 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평화스럽던 날들은 갑작스런 엄마의 죽음으로 끝이 났다. 새해가 밝은지 일곱 번째 날, 엄마는 자신도 처음인 먼 길을 홀로 걸어가시기로 작정을 했나 보다. 그 길이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았으면 했다.
엄마와의 헤어짐은 언젠가 닥칠 일이었다. 엄마가 누워있던 자리가 비어가니 집안이 넓어졌다. 1월의 햇살은 얼마나 따사로운지 엄마를 잃은 어린 새끼는 그 햇살이 엄마의 품속이라고 느꼈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날들이 바쁜 학교 일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엄마가 없는 설 명절을 보냈다. 엄마가 없다는 실감을 그제야 했다. 무람하게 시간이 가고 있었다. 그때 친구가 말을 걸어 주었다. 올레 걸으러 가자고...... 2020년 1월 31일, 드디어 올레를 위한 첫 비행을 시작했다.
시작은 늘 우연처럼
제주 올레는 전체 26개 코스, 425킬로를 걸어야 한다. 어디를 어떻게 걷든 걷는 사람의 선택이다. 우리는 21코스를 선택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난이도 하라는 안내서의 말을 믿을 뿐이었다. 걷기의 달인도 아니고, 몸이 아픈 친구도 있고, 난이도 하가 가장 적당하다고 그저 생각했을 뿐이다. 어차피 모두 걸을 작정이니 그때그때 마음 가는 대로 몸이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걷기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여행의 가장 좋은 방법이 걷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저 놀면서, 쉬어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면서, 눈과 마음에 그것들을 담으면서 사람 사는 것도 구경하면서 꼬닥꼬닥 한걸음 한결음 걷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은 언제나 그랬다. 선택을 하는 것 보다 방향을 잃지 않고 가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작은 선택에 연연하지 않으려 했다. 계획했던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COVID 19 상황이 심각해지기 시작하던 터라 더욱 조심스러웠다. 모든 것은 우연처럼 오지만 운명처럼 흘러간다.
첫 경험은 진한 여운을 남겼다. 21코스는 '하도리' 해녀박물관에서 '종달리' 바닷가까지 걷는 길이었다. 11.3킬로. 비록 먼 길은 아니었지만 겨울 햇살을 맞으며 마을길, 바닷길, 지미봉 오름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첫 경험은 서툴기 때문에 더욱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게는 21코스가 그랬다. 천천히 천천히 할 수 있는 가장 느린 속도로 지미봉을 올라가 정상에서 제주 동쪽 바다를 보았다. 최고의 풍경이었다. 그 시간의 경이로움, 애쓴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행복. 친구와 나는 그런 첫 경험을 했다.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편지를 마무리하는지금 단 하나의 코스만을 남겨두고 있다. 내게 말해주고 싶다. 잘했다고. 기특하다고. 언제나 그랬듯 너의 성실함에 대한 결과라고.
올레는 함께
올레를 걷는 동안 함께하는 사람이 계속 바뀌었다. 시작을 함께한 친구는 많이 아픈 상태이다. 최소한의 일상을 할 뿐이다. 건강을 회복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혼자 걸었다. 혼자 걷기에 적당한 길도 많다. 하지만 혼자 걸어서는 안 되는 길도 있었다. 혼자 무서움에 떨며 걸었던 길은 기억이 컴컴하다. 그 길들은 꼭 다시 걸어야 한다.
살다보면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지는 것이 세상이 이치이다. 제주 올레를 걷는다고 소문을 내는 것도 아닌데 여행을 좋아하고 제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끔 동행을 원했다. 나역시 조금씩 달라졌다. 걸은 길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제주’가 좋아지고 궁금해졌다. 제주만의 냄새가 있고, 특이한 말과 문화 그리고 특징이 있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독특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서가에는 제주에 관한 책들이 늘어가고, 제주에 관한 기록이나 잡지들이 쌓여간다. 제주의 역사와 그 시간을 건너온 사람들, 제주를 사랑하는 사람들, 제주만의 장소나 음식 그리고 지금 제주가 겪고 있는 문제나 아픔에 관심이 갔다. 덕분에 지난여름 한 달 살기를 하기도 했다.
작지만 변화가 생겼다. 주변 사람들이 '제주 올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크게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시시콜콜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로나 19의 위험한 상황 속에도 굳건히 매달 한 번씩 제주를 향하는 내가 주변인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뭐가 그리 좋아서 자꾸 가느냐고 물었다. 그럼 나는 같이 가자고 했다. 결국 직장 동료가, 조카가, 올케 언니가 자연스럽게 나의 올레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함께 올레를 걸은 사람들은 제주 올레를 즐거워했다. 그럴 때면 나는 '올레 패스포트' 사서 선물한다. 그럼 자연스럽게 또 한 명의 올레꾼이 생겨났다.
그들 중 하나가 서명숙 이사장의 편지에 나오는 올레 다단계 DDG의 주인공이다. 경남 창원에서 장애 아동 발달센터를 운영하며 초빙교수로 학과에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다. 언제나 팡팡 기운이 넘치고 다소 산만한 사람이지만 제주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지난 해 구월 올레 14-1코스를 같이 걸었다. 성격대로 그녀는 화끈하게 빠져들었고, 그것은 자신의 센터에 올레 DDG라는 동호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틈이 날 때마다 사내 동호회 회원들과 올레를 걷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다 우연히 21코스에서 서명숙 이사장을 만났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이사장은 올레 다다계(DDG)라는 말에 관심을 가져주었고, 자신이 하려는 일을 격려해주었다고 했다. 서명숙 이사장 역시 그녀의 '올레 다단계'가 매우 인상 깊었던 것 같다. 열여섯 번째 편지는 그런 인연으로 시작된 것이다. '다단계'라는 말이 갖는 부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그녀가 만든 올레 다단계는 이웃들에게 선하디 선한 영향을 미치는 조직이 될 것이다.
이제 그녀는 학교를 떠나 본래의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그녀 특유의 추진력으로 계속하여 올레 걷기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통통튀는 목소리로 전화가 올 것이다. “교수님, 저 완주했어요.”라고
에필로그
시작을 같이 한 아픈 친구, 올레 다단계를 만들 만큼 열렬한 제주 사랑꾼 그녀, 진로를 앞두고 힘들어하는 조카, 췌장암을 극복하고 있는 올케 등등 나와 제주 올레를 함께 걸어준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이제 추자도 18-1코스 하나를 남겨두고 있다. 11월 중에는 마무리하려고 계획 중이다.
25개 코스를 걷는 동안 나도 많이 변했다. 올레 걷기는 그저 제주 여행의 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제주 올레는 ‘완주’라는 분명한 목적을 누구에게나 갖게 만드는 프로그램이다. ‘완주’라는 성취를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분명 필요하지만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지금 나는 완주 자체가 목표였던 처음과는 많이 다르다.
제주에 대해 더욱 궁금한 것이 많이 생겨버렸다. 짧은 일정이지만 수시로 제주를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어느새 많이 익숙해졌다. 조금씩 제주의 속살이 느껴진다고 할까. 그래서 올레길 이외에도 해야 할 것들이 많음을 알았다. 여행이 자유로워지는 날까지 나의 제주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11월 나의 올레 완주가 끝이 나면 조카의 완주를 위한 동행을 계속할 것이다. 혼자서 무서움에 떨며 걸었던 길들을 조카와 함께 다시 걸을 것이다. 좋은 책은 또 읽어도 좋은 것처럼 올레길은 또 걸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도 가야할 곳, 해야 할 것은 여전히 많다. 한라산 둘레길 걷기, 제주 오름에서 나그네 되기, 제주 책방 돌아보기, 작은 마을 산책하기, 바닷길을 걷다 풍덩 제주 바다에 몸을 둥둥 띄워보기. 제주 박물관, 미술관 찾아보기, 제주 식물 이름 익히기, 제주 사계절 탐색해보기, 제주 음식 배우기. 이러다 진짜 제주 사람 되려나 싶다.
blog.naver.com/jejuolletrail/222337363583
[열여섯 번째 편지] '아니, 올레 다단계라니?'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코로나 시국으로 서로 간에 거리를 두고 온전한 마음을 나누...
blog.naver.com
위의 링크는 (사)제주올레가 운영하는 공식 네이버 블로그의 글이다. 공식 블로그 <제주올레>에는 제주 올레와 관련된 다양한 소식과 정보가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