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1. 6. 25. 14:51

서명숙 (2017). 영초 언니. 2017.

 

지난 2월 서귀포올레여행자센터에서 샀던 영초 언니를 이제야 읽었다. 박정희 말기인 76학번 민주화운동 시대에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던 제주올레 이사장 서명숙. 그녀가 건너온 이십 대 초반의 기억. 대한민국이 아직 동토의 겨울이었던 그 시절의 얘기들. '영초 언니'는 내가 철부지 대학 신입생이었을 때 막걸리에 취한 선배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닮아 있었다. 그 때는 그랬던 것 같다.

 

대학시절 비슷한 얘기들을 귀가 닳도록 듣기도 했었고, 많은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사연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그저 흔한 운동권 젊은이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책들을 읽느라 여러 번 읽기가 중단되었다가 방학이라는 시간이 주는 여유 때문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맑고 서늘한 여름 아침의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 아침 독서는 8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던 나의 그때를 떠오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녀 세대의 고통과 애씀을 양분으로 먹고, 신군부의 전두환이 정권을 잡아 박정희보다 서슬퍼런 폭력정치를 일삼았던 80년대 초반 나는 광주의 이야기가 비밀이 아닌 비밀로 떠돌던 시절 대학생이 되었다. 우리는 6.29 선언을 이끌어내느라 날마다 일상처럼 데모를 했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함께한 거대한 투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쟁취에 성공했으나 어이없게 군인인 노태우가 다시 대통령이 되는 현실을 보아야 했다. 말이 대학생이지 없는 집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는 운동권에 속해있던 많은 이들의 유혹을 현실적인 이유로 외면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진보를 거듭하여 우리는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는 시대를 살았고,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시대를 고통스럽게 건너오고, 다시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던 밤에 엉엉 울기도 했었다. 그러나 독재자의 딸은 촛불 혁명으로 스스로 지은 죗값을 치르고 있고, 우리가 나고 자란 것과 똑같은 삶을 살아온 지금의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었다.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에 헌신했던 '영초언니'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다. 엄마에게는 자식이 가장 중요한 법. 자식을 위해 머나먼 타국으로 떠난 영초 언니에게 행복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 교통사고로 말을 잃고 자신을 잃어버리고 만다. 

 

서명숙은 말을 잃어버린 영초언니를 대신해 영초 언니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남기기로 작정한 듯하다. 표지에 적힌 대로 오늘날 잊히고 지워져 버린 그들을 위한 굿판을 벌인 듯하다. 박수를 보내 굿판에 작은 파장 하나 보태본다. 영초 언니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어려운 시대에 대책 없이 불꽃처럼 살았던 청춘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의 강을 타고 가는 작은 배의 속도에 맞추어 서술하고 있다. 마치 자신이 만든 올레길을 걷는 것처럼 '꼬닥꼬닥'       

 

민주화운동은 젊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나같은 사이비도 있으니까. 친일 청산이나 대한민국 바로 세우기에 헌신한 분들에게는 언제나 할 말이 없다. 당신들 덕분에 내 삶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 늘 조심스럽고 부끄럽다. 역사에서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에게도 평화만이 존재했던 시간은 없다. '영초 언니'를 닮은 이들은 지금 여전히 '활동가'로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그저 활동가들이 지치지 않도록 숨어서 도와주는 작은 심장을 지닌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