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어느 날,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김효경 (2019). 어느 날, 변두리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반자본의 마음, 모두의 삶을 바꾸다, 남해의 봄날.
방학은 책을 읽기 좋은 시간이다. 도서관 2층은 청구기호 813이 가득한 곳이다. 이곳에 오래 머물렀다. 오랜만에 1층으로 내려왔다. 청구기호 331에서 책을 찾다 여름을 식혀줄 초록빛 책 빛에 끌렸다.
책을 펴낸 곳이 남해의 봄날이다. 통영에 있다고 되어있고, 작은 도시의 얘기를 발굴한다고 적혀있다. 왠지 더 끌린다. 먼저 읽고자 한 소설을 뒤로하고 궁금증에 먼저 이 책을 펼쳤다. 저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하지만 읽다 보니 김효경 작가의 문체와 필력에 빠져버렸다. 그녀의 문체가 너무 좋다.
작가는 무기력하고 좌절했던 자신이 치유되고 회복되었던 한 마을과 마을사람들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울 변두리 '자루 마을'에서 살았던 시간이,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신을 어떻게 회복시켰는지를 경험적 지식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서술하고 있다.
자루마을 사람들의 특성. 관계, 배려, 베풂, 신뢰, 호혜 등에 대해 설명한다. 사람과 사람이 남을 인정하면 자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연스레 연결되고, 연결된 사람 사이의 선과 선이 또 다른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여 공동체와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만들어진다기보다 우리들 모두 본래적으로 그런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인사하고, 나누고, 베풀면서 믿을 수 있는 단 한 번의 공동체 체험을 한 그녀는 자루 마을을 떠나 살면서 도시와 아파트와 지나친 관계 속에서 느낀 피로감을 쉽게 이기고 다시 주변의 사람과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노라 말한다.
자루 마을의 사람들이 자신에게 준 위로, 인사를 시작으로 마을에 살면서 변한 자신을 세례를 받은 종교인과 같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동안 자신은 발효되어 푹 익었기 때문에 어디서 살아도 이제 아프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함께 하자고 할 수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인문한 서적을 읽은 느낌. 7월 동안 제주에 잠시 내려와 있으면서 들고온 책 중에 읽기를 마친 첫 책이 이 책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 이제 다음 그녀의 책으로 들어가 볼까 싶다.
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마니 슈트를 입고 프레젠테이션에서 승승장구하며, 트레드밀과 전망 좋은 오피스텔과 재즈바에 어울리는 도시인이 되고 싶었다, 고부가가치의 삶이 아니라면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혼자가 되는 것이 곧 성장을 의미하기도 했다. 자기 몫의 돈을 벌고 혼자 살 집을 사는 것, 경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혼자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이 어른이라 생각했다. 당연한 성장의 증거로 여겼던 그것은 이상하리만큼 어려웠다. 독립은 혼자 경쟁에서 이기는 것과 동의어였으며 이를 위해 부지런히 자신을 갈고닦아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시간과 체력은 항상 모자랐다. 문 밖에는 온통 타인과의 경쟁밖에 없어 보였으니 문을 닫고 혼자 있는 시간만큼 안온한 것이 없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내게 남에게 베풀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고, 다른 이에게 받는 것은 구차한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하지만 마을에서 살다 보니 나는 다른 이에게 나눠 줄 것이 많고 받을 것 또한 넘쳤다. 그것이 냉장고 속의 오이든, 김치든, 시간이든, 유머든, 지식이든, 내게 남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열무 씨는 약속이다. 시를 심은 그 자리에 조금의 속임수도, 과장도 없이 열무 싹은 솟는다. 폭풍성장 또한 열무의 자부심. 자도 나면 자란다는 수사는 열무를 위한 것이다. 이웃집 노인이 열무에 경도되어 좌절도 모르고 그 권능을 설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식용이 없을 때면 한 뼘 키의 어린 열무를 뽑고 냉장고에서 별치 젓갈을 꺼내 쌈을 쌌다. 찬밥과 열무 이파리 몇 장과 멸치젓 한 숟가락이면 위장이 기분 좋게 충만해진다. 1년에 몇 번은 이런 밥상이 당길 때가 있다. 내게도 봄 여름 내내 푸성귀 쌈으로 세끼를 먹는 엄마의 유전자가 있다.
열무는 뿌리면 거둘 수 있게 해 주는 자비로운 자연의 증거이며, 세상일의 대부분은 원래 저절로 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열무를 보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구멍을 뚫고, 시를 심고, 물만 주어도 열무 씨 열 개는 보들보들한 열무 열 뿌리가 되어 배를 든든하게 채워 주는 세상에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리 걱정할 것이 없음을. 안 되는 일에 너무 애쓰지 말 것을.(31쪽)
여름철 동네 골목길에서 자동차가 엉키자 차문을 열고 나가 교통정리를 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혀를 내둘렀다. 내 일이 아니니 귀찮아질 뿐이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좀 번거로워지면 다른 사람에게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 마을 펭귄들의 사고방식에 전염되어 버렸다. (104쪽)
3부 발효의 마을
"살이 더 쪘구먼."
"마음 편하고 행복하니까 그렇지, 엄마."
"내 눈엔 하나도 안 행복해 보여, 옷은 그게 뭐냐."
아직까지 평강의 엄마는 그녀에게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엄마의 옷과 몸매에 대한 까탈이 가난한 어린 시절 낡은 옷으로 받은 상처 때문임을 알 것 같다. 궁핍한 삶에 말라붙은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엄하고 모진 엄마로 만들었으리라, 먼저 이해하고 늙은 부모에게 따스한 말을 건네는 평강이 존경스럽다.(112쪽)
자연 씨에게 느낀 긴장감의 여운이 길었던 이유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나와 그녀의 대한 안쓰러움 때문인 것 같다. 성취의 길은 오직 노력이라고 믿고 이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고 달래줄 여유가 없었던, 세상에도 스스로에게도 배려받지 못했던 내 모습이 그녀에게서도 보였다.
이 마을에서 그녀와 내가 편안해진 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사라져서가 아니다. 이것은 이곳에서 충분히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마을 박에서는 무작정 열심히 해야만, 다른 사람 모두를 따돌릴 만큼 훌륭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정이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는 너무나도 인정과 칭찬이 부족한 곳에 서 있었고, 그래서 수없이 상처 받고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1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