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1. 7. 6. 08:55

7월 3일, 제주의 동쪽 끝 마을 '종달리'를 걸어 다녔다. 하루 전 올레 1코스를 걸으며 지나갔던 마을이다. 올레 걷기에 집중해야 할 때는 눈에 드는 모든 것을 꼼꼼히 즐길 수 없다. 조카의 맘에 든 빵집도, 내가 좋아하는 소품집과 책방도, 맛있는 냄새가 유혹하는 모든 곳을 들어갈 수 없다. 닫힌 문 너머로 어떤 공간이 숨어 있을지 이른 아침에는 알 수 없다. 조카와 마음이 통했다. 오늘은 종달리에서 먹고, 걷고, 보고 느끼기로.

 

 

가장 먼저 밥집 '릴로(Lillot)'로 갔다. 대기 예약을 해야 했다. 실내에는 이미 사람이 가득 했고, 오픈 주방에서는 맛있는 냄새를 계속 만들고 있었다. 배가 고픈 나는 맛있는 식사를 기다려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차를 '종달 리민 회관'에 세워두고 오기로 했다. 종달리를 크게 빙 돌아 차를 세우고 천천히 천천히 마을 안으로 걸어왔다. '종달아구찜', '순희밥상', '승희상회', '바다는 안 보여요'를 지났다. 저절로 웃음이 나는 이름들이다.

 

'room 598'의 문이 활짝 열려있다.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마음이 담긴 패브릭포스터에 마음이 갔다. 그림 안에 '지미봉', '갈대밭'과 '201번 버스'가 들어있다. 후후.   

 

 

그러는 동안 릴로에서 연락이 왔다. 릴로의 식사는 대만족이다. 자연식에 가까운 구성이다. 감자 스프 너무 맛있다.

 

 

'책약방'으로 갔다. '사람 대신 책이 지키는 책방'이라는 안내가 있다. 정말 작은 책방이다. 1평도 안되어 보인다. 가장 아래쪽 사면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림책이 잔뜩 꽂혀있고, 가운데 책상이 있다. 책상에는 스탬프에 책, 각종 색연필가 잔뜩 준비되어 있다. 벽면에 붙은 서가에 전시된 책이나 물건들은 보물 찾기를 해야할 할 정도다. 전날 유치원 아이들이 책방에 가득했던 이유를, 선생님이 아이들을 이곳에 데리고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판매용 책들은 과일 박스를 재활용하여 만든 서가에 책꽂이에 조금씩 덩어리 지어 있다.

 

 

누구나 찾아오길 누구나 언제나 책을 즐기고 가라는 공간이다. 책방을 찾아온 누군가에게 혹여 아픈 마음이 있다면 보물찾기 공간에서 책을 보며 낫기를 바라는 책방지기의 마음이 느껴진다. 이책 저책 꺼내는 일 자체가 보물 찾기인 공간이니까. 여기서 나는 김양희의 '제주로 시집온 서울 토박이가 쓰고 그린 시어머니의 제주밥상'이라는 긴 제목의 책을 샀다.    

 

 

돌담 위로 능소화가 가득 피어있다. 마당을 지키는 하얀 고양이도 보인다. 차로 달린 길을 내 발로 빙 둘러 '근자C가게'로 갔다. 수국에 빠져 걷다 보면 그저 낡은 창고라고 생각할 만한 곳에 근자C가게가 있다. 친구에게 줄 면 손수건과 세척용 솔을 샀다. 제주에 정말 살고 있었다면 거실에 책방에 두고 싶은 스탠드가 이쁜 가게이다.

 

'소심한 책방'은 마을에서 약간 벗어나있다. 조카가 차를 타고 가자 해 차로 이동했다. 걷는 것과 차를 타는 것의 차이. 목표를 향한 속도이다. 금방 도착했다. 하지만 정기 휴일!!!!!

 

 

'책자국'으로 갔다. 처음 올레를 걸었던 작년 1월 말, 지미봉을 내려와 산길 골목을 빠져나와 바로 입간판을 보았던 곳이다. 언젠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오늘이다. 인기 공간인가 보다.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고, 오래 앉아 차를 마시고, 책을 보고, 필사를 하고, 창문 너머 제주의 바람을 즐기고 있다. 우리도 그들과 같이 지내다 나왔다. 조카와 나 각각 제주와 관련된 그림책과 만화를 한 권씩 샀다. 책자국의 책꽂이가 마음에 들었다.

 

 

 

'Pilgi, 필기'로 간다. 오래된 수동 타이프로 작업을 할수 있다던 공간, 역시 귤빛 낮은 지붕 안에는 필기용 문구가 우아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쪽 공간에 두대의 타이프는 바쁘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업하는 그들에게 방해가 되면 안 될 것 같아 조용히 물러 나왔다. 제주의 동쪽 끝마을은 이렇게 바쁘지만 조용하다. 근처 '수아네잡화점'에서 방향제를 사서 집으로 왔다.

 

오후 4시면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마치 유럽의 사람들처럼 '저녁이 있는 삶'을 당연하게 살고 있다. 해가 뜨면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해가 지기 전에 일을 마치고, 해가 지기를 기다리는 삶. 늦은 퇴근을 하면서도 남은 일마저 집으로 들고 와야하는 도시인에게는 부러운 사람들의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