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요조 산문(2021).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마음산책.
긴 시간 터를 잡고 머물면 어디서 살든 일상이 되는 줄 알았다. 3박 4일과 한 달은 큰 차이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매일매일 바쁘다. 자야 하고 먹어야 하고, 강의(계절학기 온라인)도 준비해야 하고, 올레길도 걸어야 하고, 카페도 책방도 이쁜 소품 샾도 가야 하고, 숲에도 가야 하고, 바다도 가야 하고, 산에도 가야 한다. 책 읽을 틈이 없다. 항상 들고 다니며 틈을 쪼개 쪽 읽기를 한다. 책 한 권 읽는데 엄청 오랜 시간이 걸린다. 휴~ 내가 원했던 것은 이게 아니었는데.
제주에 도착하고 다음 날, 올레 1코스를 걸었다. 조용한 마을 시흥리에서 시작해 말미오름, 알오름을 지나 성산 일출봉과 계속 함께하는 길은 너무 즐거웠다. 걷는 것은 내 몸을 다독거리고, 눈으로 몸으로 세상을 즐기는 시간이다. 물론 간혹 괴롭기도 하다. 괴로움과 즐거음을 동시에 느끼며 15.1킬로 걸었다. 점심을 먹고 첫 책방 산책으로 간 곳이 수산리의 '책방 무사'이다. 이 책은 그때 내가 산 책이고, 제주에서 첫 번째로 내게 온 책이다. 요조의 책방에서 요조의 책을 샀다. 지금 생각하면 탁월한 선택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이 배우고 생각이 넓어지고 정리가 된 덕분이다.
도서관의 책에 줄을 긋거나 메모를 달고 싶어지면 죄책감이 생긴다. 그러나 내 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그녀의 책을 읽는 동안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새벽에 낮에 밤에 그리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책을 읽을 떄마다 펜이나 연필로 마음껏 줄을 그으며 대화를 했다. 줄을 그을 것이 많다는 것은 그녀의 언어에 내가 공감한다는 말이다.
'실패'라는 단어에 그것을 '사랑'한다는 단어까지 들어간 제목을 보고 지금도 미래도 불안한 조카는 뾰족해져서 예민하게 싫다고 반응했다. 충분히 이해했다. 함께 여행을 하는 동안 좀더 친해지고, 떨어져 지낸 시간 동안 달라진 서로를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24살 조카. 이제 직업을 결정할 나이지만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어 불안해하고 초조해한다. 그런 그녀에게 실패나 사랑은 듣기 거북할 수 있다. 조카는 이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킥킥거리면 읽는 고모가, 책을 읽으며 줄을 긋거나 쓰고,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대는 내가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언젠가 편안한 마음으로 이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을 읽는 동안 '형'을 생각했다. 기다리면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변했을지 건강한지 궁금했다. 자유롭게 살기를, 건강하게 살기를, 형답게 순하게 따뜻하게 살아있기를 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남겨놓은 많은 언어 중 단 하나를 남겨본다. 책을 낱말<글>로 바꾸니 마치 내 마음 같아서.
책(글)을 쓴다는 것은 내 이야기를 취합해서 정리하고 끝나는 어떤 마무리로써의 행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함께 얽혀 들어가며 다시 시작하고 부딪혀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책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체험한 것 같다. (123쪽, 나는 아무튼 떡볶이라는 책을 쓰고 이런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