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1. 8. 13. 11:44

김사과(2013). 천국에서, 창비.

 

책에 실린 작가의 사진이 완전 요즘 젊은이들 같아 기대를 엉뚱하게 했나 보다. 혹시 그녀의 '천국'이 내가 아는 젊은이들의 '지향'과 닮았다면 그래서 조금이라도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다. 거기에 아주 약간의 호기심이 소설을 손에 들게 만들었다.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문장이 가득한 1부를 간신히 통과했다. 뉴욕의 젊음(?)들은 그렇다고 치고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으니까. 서울로 돌아온 케이의 얘기인 2부는 더욱 간신히 통과했다. 그러려나 하고 싶었지만 나도 이미 꼰대인지라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 했다. 질질 다리를 끌며 건너왔다. 3부에는 노동 현장, 양극화가 추가되었다. 케이가 힘들어하고 외로워하고 삐뚤어지는 것을 보니 내 젊은 날의 열등감도 기억이 났다. 

 

작가에게 미안했지만 듬성듬성 대충대충 읽고 마무리했다. 계속 읽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20대를 통과한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나로서는 이해할 수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과 행동이 있었음을, 그것이 소설의 장치임을 알고 있지만 힘이 들었다는 사실도. 20대는 폭주와 불안의 시절임에 분명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이 모든 것이 나의 편협함 때문임을 인정한다.

 

소설을 읽는 동안 계속 환청같은 소음이 들렸다. 요즘 것들의 소란함과 닮은. 주제를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대화를 닮은. 즐거운 건지 행복한 건지 아님 슬픈 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개인들의 말투와 화법 그리고 단어를 가진. 청자를 고려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 방식의 의사소통 등. 칼처럼 후벼 파는 단어들, 듣기에 거북한 저렴한 단어들이 난무하는 환청이 계속 들렸다.

 

 나는 평화롭기를 원한다. 그래서 환청을 들어가면서 까지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래서 읽기를 대충 마무리했다. 멀쩡한 정신으로는 가야 할 길을 알 수 없는 미로 같은 거대도시의 어둠 속을 거칠 것 없이 제멋대로 달리는 폭주족 무리와 같은 소설이다. 그런데 그 폭주족 아이는 벗겨보면 순수하기 그지없다. 순수한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폭주하는 자신이 이상하고, 폭주족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리석도록 단순하고 순수한 자신이 보여 혼란스럽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십 대. 그 광란의 시간대를 잘 건너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