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다원
한림 '소소재간'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그림 속의 여자가 마치 내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 그만큼 이 작은 그림이 크게 다가왔다. 커다란 메타세콰이아가 가로수처럼 늘어서 있고, 그 사이사이로 차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이곳이 대체 어디인지 무척 궁금했었다. 이런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바람처럼 왔다.
7월 23일, 이제 제주 생활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다. 서귀포에서 자신의 센터를 운영하는 후배와 만나기로 했다. 제주시에서 5,16도로(1131번)를 타고 서귀포를 향했다. 긴 여행의 피곤이 누적된 탓인지. 여행중 계절학기 수업을 무사히 잘 마쳤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심한 졸음이 몰려왔다. 한라산을 넘어 거의 서귀포에 가까웠을 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찰 주차장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출발했으나 이미 늘어진 눈꺼풀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때 '서귀다원'을 알리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의 색깔이 짙은 나무를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이 모두 차밭이다. 주차장인듯한 넓은 공간이 입구에 있었으나 이미 눈은 낮은 언덕길 위에 소박하게 서있는 돌담과 집을 향해 있었고, 비포장 도로라고 하긴 너무 단단해 보이는 하얀 신작로(?)를 따라 그림에서 본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늘어서 있었다. 그곳은 서귀다원이었다.
찻집에서는 모두에게 공평한 오천원으로 시원한 두 종류의 녹차와 감귤청을 즐길 수 있었다. 여기저기 편안한 웃음소리와 낮은 대화 소리가 오갔다. 아이들이 움직이는 소리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차를 마시니 정신이 들었다. 눈이 맑아지니 편안함이 몰려왔다. 천천히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차를 마셨다. 멀리 마당에 두 마리의 고라니가 어디서 왔는지 뛰어놀고 있다. 아!!! 이곳이 천국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녹차밭을 걸었다. 녹차밭 너머로 한라산이 보인다. 안전한 장소에서 삶의 불안이나 초조함이 없이 혼자서 천천히 걷는 순간의 달콤함. 내가 그림 속의 그녀가 된 것처럼 마음에 위로와 평화가 찾아들었다. 다원의 마당을 지키는 고양이 가족들이 있었다. 이제 낳은 얼마 안되어 보이는 아기 고양이들은 걱정도 근심도 없이 넓은 마당과 푸른 차밭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근처 토평동에서 17일을 지냈는데 거의 매일같이 근처를 지나다니며 '내일은 같이 가보자' 하고 찾지 않았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눈앞에 진주. 어리석은 사람은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진즉에 알았다면 아마 여러 번 찾지 않았을까. 윤이도 함께 이 평화의 순간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쉬움을 남기며 돌아서는 것이 여행이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보다 우연과 행운이 다시 만나게 해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좋은 것은 좋은 사람들과 나누게 되어있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