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1. 10. 2. 07:14

정유정(2021). 완전한 행복, 은행나무.

 

정유정 작가의 6월 출간 따끈따끈 신간. 도서 신청을 했다. 진즉에 입고된 걸 알았지만 책은 넉 달 동안이나 다른 이들에게 갔었다. 어제서야 도서관에서 나를 기다리는 책을 발견했다. 반가운 맘에 얼른 집어 왔다. 읽어야 할 다른 책도 많았지만 연휴 첫날 이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그녀의 칼날 같은 언어가 얼마나 또 긴장하게 만들지 몰입하게 만들지 기대하면서.

 

20시간 동안 <작가의 말>까지 521쪽을 내리 읽었다. 이 시간 동안 텃밭을 다녀온 것 외에 외출도 않고. 역시 그녀의 문장을 사람으로 하여금 몰입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 은호와 유나도 시작은 행복했다. 

 

"주변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나는 곳은 하늘이었다, 먼 지평선에서 유성이 빗줄기처럼 떨어지고, 검푸른 하늘에는 성운이 군도처럼 깔렸다. 한 발짝씩 전진할 때마다, 별들이 이마 위까지 활주해왔다. 어찌나 밝고 어찌나 가까이에서 반짝이는지 별빛이 얼굴을 파랗게 적시는 기분이었다.(83쪽) "

 

모든 것이 저절로 이뤄지는 듯한 때가 있다. 하늘이 자신을 위해 큰 그림을 그려주는 것 같은 때. 그때가 바로 그때였다. 그는 온 우주가 보내는 호의적인 기운을 느꼈다. 운명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자신을 돕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바와 동네 개떼와 보드카를 총동원해서.(90쪽)"

 


- 유나 : 은호가 생각하는

 

"그는 숨을 삼켰다. 아내의 미소가 봄 햇살처럼 환해서. 아내의 목소리가 개울물처럼 조곤조곤 귓가로 흘러와서, 그를 보는 눈이 겨울바람처럼 차서, 자그마한 얼굴이 내뿜는 온기와 한기의 낙차에 머리가 띵해서.(98쪽)"

 

"아내는 여전히 눈을 내리뜬 채 대답헸다. 어조도, 목소리도 평상의 고요를 되찾은 느낌이었다. 셔터를 내린 닫힌 창처럼,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표정을 빼면. 식탁에 앉은 모두를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표정이었다. 연애시절부터 순간순간 나타나 그를 밀어내던 표정이었다. 함께 있지만 멀리 있는 것 같고, 잘 안다고 믿는 순간 낯설어지는 빙벽 같은 표정이었다.(109쪽)"

 

- 은호

 

"아버지는 퇴직과 함께 졸혼을 선언하고 제주도로 가버렸다. 이후 어버지를 만난 건 딱 두 번이었다. 윤희와 결혼하던 날 한 번, 유나와 결혼하던 날 한번. 서운한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도 남았다. 어머니는 그런 것 같지 않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도망치게 한 장본인이 바로 당신이라는 것도 인정하지 않았다."(96쪽)

 

"세상이 훅,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은 까맣게 암전됐다. 어둠 속에서 그는 폭음처럼 터져 나오는 자신의 비명을 들었다. 아냐. 아니야, 아니라고......(125쪽)

 

- 재인(유나의 언니)

 

유나는 책상 서랍을 열고 가위를 꺼냈다. 설마 하는 사이, 오리 다리 한쪽이 싹뚝 잘려나갔다. 이어 다른 쪽 다리, 주둥이, 남아있던 한쪽 눈알, 삽시에 오리는 노란 털 뭉치가 되어 유나의 발밑으로 흩어졌다.

 

그건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독차지한 건 엄마의 미움밖에 없었다. 그녀는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으나 여전히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토록 맹렬한 증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게 쉽지  않았다. 증오보다 강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그녀에겐 없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버틸 배짱조차 없었다. (160쪽)

 

그는 그녀를 여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봤다. 가장 가까운 단어를 찾자면 '야채' 정도나 될까. 달콤하진 않지만 가까이에 있고 반하지는 않았으나 안전하며, 즐거움보단 이로움을 주는 존재 야밤에도 거리낌없이 찾아갈 수 있고, 태연하게 재워달라 말할 수 있으며, 편안하게 자고 가도록 배려해 주는 사람.(175쪽)

 

- 지유

 

준영과 유나의 딸. 삶의 초반부에 겪는 끔직한 경험이 아무리 소설이지만 지유의 삶을 제발 갉아먹지 않기를 그저 바랐다. 


읽기 시작하면 누군가가 떠오를 것이라고 했다. 역시 그랬다. 작가는 그 누군가는 그저 동기일뿐 우리들의 '행복'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행복하고자 노력한다는 말이 나의 행복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없애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끔찍한 생각에 전율했다. 나의 행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운 세상이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중요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내가 행복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의 행복도 중요하다고 공감해야 하는데 작금이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자신의 삶이나 행복을 위해 살인을 불사하는 유나는 결국 자신의 입장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죽었다. 악인이므로 죽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녀가 거짓말을 진실로 말한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알 수 없다. "모든 나르시시스트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모든 사이코패스는 나르시시스트다." 자존감과 나르시시즘. 자존감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학습되는 나르시시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가 되었다.

 

이렇게 긴 소설을 제대로 리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읽기 초반부 유나, 재인 그리고 은호와 지유에 대해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시작은 했으나 결국 정리는 포기했다.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역시 장편이 재밌다.

 

흥미로웠던 부분 : 앞으론 습지에 날아드는 오리들이 그냥 보일 것 같지 않다. 대체 '되강오리'는 누구냐. 초반부에 '민서기' 라고 나왔을 때 오타인줄 알았다. 아니었다. 나만 모르는 낱말인가? 작가는 실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보았을까? 여행 가고 싶다. 바이칼 호수로.  유키즈에 나왔던 그녀의 소설 노트를 꼭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