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TRIP

제주 올레 18-1코스, 추자도

Jeeum 2021. 11. 6. 12:10

20211030

제주 올레 마지막 코스

18-1코스 추자도 당일치기 걷기 여행

 

일출 전, 6 20

어둠 속에 출발

비행기 창 너머로 동쪽의 일출을 보았다.

 

오늘은 제주 올레 마지막 코스를 걷는 날이다.

작년 1월 시작해서 1년 10개월

어떤 느낌이 마무리를 함께 할지 몰라 두근두근 가슴이 설렜다.

 

제주 공항에서 아침을 먹고,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에 여유롭게 도착했다.

추자도를 가려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아

기대감은 더 커졌다.

 

길 건너편은 사라봉으로 올라가는 올레 18코스

처음 혼자서 걸었던 그날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여객터미널 2층에서 우리가 타고 갈 퀸 스타 2호를 보았다.

 

옛 '제주세관'의 자리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보이고,

일제강점기 강제 이주로 징용을 살았던 우리 노동자를 기리는 동상 등등

여객 터미널 주변에도 제주의 역사가 잔뜩 있었다.

 

여유롭다.

 일찍 출발한 덕분이다.

일찍 시작한 하루는

시간의 여유를 주고

마음의 여유까지 준다. 

앞으로의 나의 삶에도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늘 함께 했으면 소망했다.

 

제주항 여객터미널에는 면세점까지 있다는 사실

추자도로 해남으로 가는 사람들도 작은 면제점에 들릴 수 있다는 사실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여긴 국제여객터미널.

면세점이 있는 게 당연해야 한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조만간

다시 타국으로 여행할 날이 올 것이다.

건강한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랐다. 

 

조카가 준비해온

멀미약을 먹고,

행여나 성가신 멀미가 올까 봐 두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했다.

두 번 정도 까무룩 자고 났더니

'상추자항'에 도착한다는 음성이 들려왔다.

전면으로 분주한 상추자항의 모습이 들어왔다.

 

추자도의 첫 인상은 그저 어수선했다.

제주의 다른 섬이 아기자기하고 제주 특유의 빛깔이 있다면

추자도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제주에서 낯선 다른 곳으로 이동했나 싶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갔다가

다시 배를 타고 남해안으로 건너온 느낌이었다.

 

표지판들 위로

어지럽게 잔뜩 얽혀 늘어져 있는

전깃줄의 복잡함이 추자도의 지금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18-1코스의 출발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 사이에서 마지막 출발 스탬프를 찍는 나는 아찔아찔했다..

 

추자도 올레는 두 개의 섬(상추자도와 하추자도)을

한 바퀴 돌아오는 길이어서

시작과 종점이 같은 자리다.

 

시작과 마지막이 나란히 놓여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과 사가 연속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종점 스탬프를 배를 타기 전 오늘 하루를 생각하며 찍기로 했다.

그래야 정말 마무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서.

 

걷기 시작했다.

전체 18.2킬로를 걷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가능한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기로 했다.

마음이 분주했다.

잿빛 하늘에 깔린 파란 빛깔을 밟고 언덕을 올라갔다.

올레를 걷는 이를 환영하는 메시지가 도드라져 보였다.

 

추자초등학교의 알록달록 교사가 보였다.

시골 마을의 지붕들을 모아논 듯한 학교.

무지개 빛깔을 차례차례 정성껏 칠한 듯한 학교였다. 

학교의 빛깔이 밟고 영롱해서

이쁜 꿈을 꾸는 아이들이 가득할 것 같았다.

 

 

시작부터 언덕길을 계속 걸었다.

그리 높지 않으나 계속 언덕이다.

마을길,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당연히 바다가 가장 먼저 보인다.

 

근데 참 이상하다.

허전하다.

흐린 날씨 탓일까?

탁 트여 시원한 풍경이고 여전히 아름다운 풍광인데

왜 허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처음 느낀 이 허전함은 걷는 내내 계속되었다..

 

추자도 올레길에는 간세가 없다.

그저 나뭇가지나 전봇대에 올레 리본이 자주 달려있을 뿐이다.

올레길지기처럼 언제나 나타나던

그 파란 간세가 없는 올레길.

허전함의 이유가 간세 때문일까?

 

추자도 올레가 상급 코스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렇게 계속 오르고 또 오르고 내려간다.

뒷짐을 지고 무념한 채 걷는 이십 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계속 오르다 보면

이렇게 시원한 풍경이 두 눈 가득 들어오는 곳

거기가 추자도이다.

 

작은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했다.

날렵한 몸을 한 새끼 도마뱀이 특유의 걸음걸이로 빠르게 이동해갔다.

 

조카는 어린 시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동변동에도

도마뱀이나 곤충이 무척 많았다고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자신은 친구들과

늘 도마뱀이나 곤충들과 공원에서 놀았다고 했다.

깜짝 놀랐다.

우리 동네에서 시골을 느끼며 자랐다니,

전혀 몰랐던 얘기였다. 

 

추자도의 도마뱀 덕분에 조카의 어린 날에

자연이 함께 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동네에 같이 살았는데

추억하는 내용이 완전히 달라 놀랐다.

엄청난 차이였다.

 

'봉글레산' 입구이다. 계속 산이다.

계속 언덕이다.

 

봉골레산이라는 표지석 앞에 섰다.

당연히 산이니까

사방에 바다가 보인다.

여전히 뭔가 빠진 듯하다..

봉골레산이라는 지명은 파스타 봉골레를 생각나게 했다.

봉골레가 맞는지 봉글레가 맞는지 알 수 없다.

 

산길을 내려간다.

이쁜 담장을 한 마을이 보인다.

순효각을 가리키는 올레 화살 표식에 그림들이 가득하다.

골목 안으로 파스텔 빛깔이 이어진다.

이야기가 가득할 듯한 마을이다.

 

여기는 제주, 거기에 '추자도'인데,

어릴 적 살던 골목을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다.

집의 모양새가 제주 섬에서 보았던 집과 많이 달랐다.

제주라곤 하지만

제주가 아닌

제주이면서 육지이기도 한 곳

그곳이 바로 추자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효각을 지나 다시 오르막길로 들어섰다.

멀리 산신각이 보인다.

밭에 아직 어린 열무가 그득하다.

뽀시래기지만 텃밭 농사꾼에겐

이곳의 식물들이 여사로 뵈지 않는다.

 

추자등대를 향한다.

대나무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걷는다. 

왼쪽 편으로 가장자리 땅이 푹 꺼져  버렸다.

넘어졌다.

오른쪽 무릎을 찢고 말았다.

옷도 옷이지만

다치면 안 되는데~

아야 아야

 

 

갈림길이다.

오른쪽으로 가면 나바론 하늘길,

왼쪽은 추자 등대로 가는 올레 코스이다.

그냥 보기에도 길은 험해 보인다. 

저 거친 절벽을 따라 걸으면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저곳에서 보는 

풍광이 얼마나 귀하고 황홀하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해 보이는 길을 가야 하나.

넘어진 오른쪽 무릎은 이미 살짝 통증으로 말리고 있는데,

망설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조카가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고 한다.

애초에 절벽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용둥범'으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하늘 아래 가장 짜릿한 길을 즐겨야 했다.

그러나 내 체력과 무릎으로는 무리였다.

그러나 살짝 맛을 보고 싶은 것은 말릴 수 없었다.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위쪽으로 위쪽으로 날카로운 바위돌을 딛고

힘겹게 올라서면서 걸었다.

길은 점점 더 험해지고 끝이 없을 듯했다.

포기했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 나. 

절벽이 아무리 가파르다 해도

굳이 '나바론'이라고 이름 붙일 이유가 있었을까?

 

고전 영화 '나바론 요새'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동양화에 나올법하다는 길의 이름.

좀 더 재고했으면 좋겠다.

 

조카를 만나 '추자등대'를 향해 걸었다. 

멀리 거대한 등대가 보인다.

등대가 밝히는 길을 따라

'세월호'의 아이들도 꿈을 꾸며 제주를 향해 갔으리라.

멀리 등대를 보니

새삼 '세월호'가 문득 떠올랐다. 

아이들의 명복을 빌어본다.

 

등대를 빙 돌아 반대편으로 내려간다. 

바람케 쉼터에는 트럭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추자대교'가 보인다.

다리를 건너 하추자도로 넘어간다.

 

다시 고갯길이다.

낙석 위험으로 우회한다는 표시를 보고

좋아했더니 아스팔트의 경사도 장난이 아니다.

어휴.. 버스 타고 싶다. 

이럴 땐 아무 생각 안 하는 것이 최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조카가 깜짝 놀란다.

바닥에 지렁이들이 말라죽어있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너무 많다.

사진조차 찍기에 민망할 정도로 많다.

피해 걸어가기 어려울 정도다.

대체 지렁이의 세상에 무슨 재난이 있었던 것일까?

 

이제 5킬로 지점이다.

숲길로 접어든다.

묵리 교차로가 나온다.

오른쪽으로는 묵리 슈퍼 가는 길

왼쪽에서 오는 길은 하추자도를 돌아 나오는 길

오고 가는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는 곳이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우리는 중간 스탬프를 위해 묵리 슈퍼를 향한다.  

 

좁은 돌담길 멀리 묵리 슈퍼가 보인다.

좁은 골목길은 언제나 정겹다. 

가만 보면 추자도에는 돌담도 거의 없지만

있는 돌담도 제주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밭담도 산담도 없다.

추자도의 문화는 육지의 것에 가깝다. 

제주와 육지의 경계에 추자도가 있는 것처럼

 

묵리 슈퍼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컵라면에 삶은 계란이지만

바라보는 풍경은 고급지다.

 

이제 묵리를 지나 산양리, 예초리를 거쳐

돈대산을 넘어오면 다시 여기로 돌아온다.

그리고 산길을 거쳐 추자도의 북쪽 바다를 바라보면 

걸으면 다시 상추자항에 도착하게 된다.

 

나의 무릎은 경계의 신호를 보내고

백신 2차 접종의 탓인지 몸은 점점 무거워 온다.

조카와 의논하여 상추자항을 향해 걸어 나가기로 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걷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있으나

이 길이 없어지지 않는 한 다시 찾을 기회는 많을 것이다.

 

추자도의 담은 캔버스를 안고 있는 미술관이다.

그리고 

곳곳에 설치 미술 문화 공간이 꽤 많았다.

묵리에도 '묵리 낱말고개'라는 전시물이 있었다.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알록달록 문자들이 가득한 창고 

한참을 머물렀다.

언어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언제나 크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가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옷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그저 비를 맞으며 걸었다.

묵리 고갯길에서 바라보는 추자도의 남쪽 바다. 

여기가 '제주의 시작'이란다.

 

영흥 쉼터에서 무거운 다리를 쉬고,

길가의 꽃들과 바람과 함께 걸었다.

 

조카와 나란히 걷는다.

 

같은 것을 보고

나란히 걷고 

함께 웃는다.

그 사이

우리들의 '정'은 소리 없이 깊어진다.

 

 잠시 멈추자.

바람과 함께 춤을 추자.

'2020 마을 미술 프로젝트'를 알리는

추자 문화공연장을 지났다.

여기도 바람의 마을.

이름이 춤을 추는 듯하다.

 

영흥리와 대서리를 거쳐 

올레 센터에 도착했다.

드디어 마지막 스탬프를 찍는다.

 

멀리 하늘엔 구름이 몰려오고 

잿빛으로 물이 들기 시작한다. 

곧 배를 타고 떠날 것이다. 

추자도와도 인연이 또 이어지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