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1. 11. 15. 11:48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아름다운 가사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다. 출근길 자동차 안,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원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생각이 잊고 지냈던 오래전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엔 엄마가 나와 함께 있었다. 

 

2011년 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는 2년 뒤 쓰러져 고관절 골절로 입원을 했다. 무던히 애를 썼지만 스스로 관리가 안되던 엄마의 입원은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휠체어에 앉는 것이 가능해진 엄마를 모시고 병원 옥상 정원으로 늦은 봄날의 햇살을 맞으러 갔었다. 옥상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작은 싹들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식물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아는 것은 고작 채송화 정도.

 

장애 아동이든 치매 노인이든 인지력을 조금이라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극이 필요하고, 기분좋은 경험이 될 주제에 대해 수준에 맞추어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이다. 특수교사이면서 언어재활사인 내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는 지식과 경험을 동원해 엄마를 지지해주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하고 있었다.

 

여름이 아직인 늦은 봄날의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며 정원에 도착했다. 가득 피어있는 꽃들의 이름을 엄마에게 물어보았다. 수술용 마취 주사 때문인지 엄마의 인지력은 이미 많이 나빠져 있었다. 때문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던 시기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꽃과 나무를 좋아하는 엄마와 꽃과 나무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니까. 그러나 엄마는 모든 꽃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그것도 모르냐고 핀잔까지 주면서. 심지어 채송화의 싹을 보고 채송화라고 말하고, 이름 모를 옆의 잎을 보고도 '과꽃'이라고도 말했다. 마취 주사 때문에 떨어진 엄마의 인지력이 몸이 회복되면서 서서히 입원 전의 상태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날의 햇살만큼 하늘만큼 행복했다.

 

나는 그 정원에서 싹을 틔우고 있던 채송화와 과꽃을 훔치기로(?) 했다. 너무 많이 피어 있었기에 조금 파가도 될 것 같았다. 다음날 휴대용 작은 칼을 가지고 가서 채송화와 과꽃 싹을 몰래 훔쳤다. 그리고 우리 집의 베란다에 심었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와서 봐주고 기억해주기를 소망하며, 그 꽃의 이름을 내게 들려줄 날을 기약하면서 몰래 혼자.

 

다행히 채송화와 과꽃은 잘 피어났다. 퇴원한 엄마는 엄마 대신 내가 새로 정리하고 꽃을 피운 '베란다 정원'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하루 종일 햇살 와랑와랑한 우리 집에는 엄마가 키우던 베고니아, 하늘고추에 채송화, 과꽃, 나팔꽃까지 꽃들이 언제나 가득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 꽃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대화하며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언제나 엄마가 꽃의 이름을 잘 말해 주었던 것은 아니다. 잘 대답하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엄마의 상태를 점검하러 온 사회복지사가 햇살 가득한 집에 강아지 한 마리와 베란다의 꽃이 가득한 우리 집이 엄마와 같은 노인에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라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엄마는 멀리 가셨지만 나는 여전히 그 집에서 베란다에 좋아하는 식물을 가꾸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다. 엄마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강아지 '또삐'도 엄마 가신지 한 달 후 엄마를 따라갔다. 오늘은 생일이다. 엄마 대신 올케언니가 정성껏 끓여준 미역국과 반찬으로 생일날 아침을 잘 먹고 집을 나섰다. 

 

생일날 출근길에 우연히 '과꽃'이란 동요를 들으니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혼자 맞는 생일이라고 쓸쓸할 나이도 이미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무수하게 많은 날 중 그저 귀한 하루일 뿐이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이 축하받을 일이라면 오래전 젊은 엄마가 나를 낳느라 온 몸으로 애썼던 것을 그 자식이 기억해주어야 하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러나 엄마가 그리운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