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 : 춘천
새벽 서쪽 하늘 끝에 여전히 보름달이 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북대구 IC를 벗어나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달렸다. 지면을 향해 기울어가는 달님을 벗 삼아 짙은 안개를 뚫고 조심조심, 아슬아슬 춘천에 닿았다.
고개를 넘어 미끄러져 내려갈 듯한 경사면 아래 춘천 IC가 있다. IC를 지나면 '낭만의 도시'라는 안내가 오른편에 보인다. 춘천의 가을은 맑고 고운 햇살에 깊어가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한림대학교'에 무사히 닿았다. 일찍 출발한 때문일까 여유로운 시간에 도착했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토요일의 대학 캠퍼스도 혼자 화려하게 가을을 타고 있었다.
서문 옆 '소프트웨어융합대학' 건물이 묘한 정취를 주었다. 나름 새롭게 단장을 했지만 타고난 성품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예전 국민학교 건물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건물이 '성심여자대학' 건물이었다. 수필가 피천득의 '인연'의 첫 구절에 나오는. 세 번의 인연. 아사코를 생각나게 하는 춘천의 성심여자대학. 성심여자대학을 전신으로 한림대학교가 되고 이렇게 아름다운 캠퍼스로 성장했다는......
비대면 학회 진행을 하는 틈새에 여선생 셋이 가을 속으로 산책을 했다. 노랗고, 붉고, 푸른 가을잎들이 나무에도 땅에도 그득했다. 아무리 사뿐사뿐 걸어도 발바닥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겨울을 기다리는 나무 우듬지에도 아슬 거리며 햇살을 담은 이파리가 조심스레 달려있다. 햇빛이 조도를 살짝 바꿀 때마다 나뭇잎들이 소리도 없이 떨어진다. 나무 아래 서서 하늘 쪽을 바라보면 햇살이 붉은 이파리에서 흩어져 내게로 달려 내려오는 듯하다. 이파리가 소리를 치는 듯하다. 소리가 여인들의 즐거운 웃음이 되어 흩어져갔다.
학회를 마치고 먼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어 왔던 길을 되돌아나왔다. '김유정로'라는 도로 표지판에 마음이 설렜다. 저 길을 따라가면 서울 가는 전철을 따라 '김유정역'이 나오고, 그 역에서 시윤을 만나 '엄마'와 함께 다시 '양구'로 달렸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기억은 여기 춘천의 도로에 아쉬움으로 남겨두고, 남쪽을 향해 달려 나간다. 도시인의 삶이란 여유롭게 지난날을 추억할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더 추워지기 전에 내일은 텃밭의 무와 당근을 뽑아야 한다.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이다.
이미 어두워진 고속도로를 달렸다. 빈 속에도 졸음이 욌다. 그러나 '가을 배웅'이라며 그녀가 보내 준 '춘천의 보름달'에 마음이 금방 따뜻해졌다. 그 보름달은 운전하는 내내 왼편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지켜주고 있었다. 덕분에 안전하게 무사히 집으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