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1. 12. 1. 14:24

김영하(2014). 보다 see 見, 문학동네.

 

2019년 코로나 19 이전의 세상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소설가가 쓰는 '수필'은 머쓱하고, 가드를 내리고 상대를 맞는 권투선수 같은 기분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 아닌 그의 산문은 무척 재밌고 읽는 동안 행복했다. 가끔은 소설이 아닌 문법으로 글을 계속 써주길 바란다. 

 

세상을 제대로 보는 방법은 '본' 것을 쓰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볼' 것이 지나치게 넘치는 세상에서 더 이상 '본다'는 행위가 이성적이지 않으며 그저 흘러가는 물결 같다고 했다. 제대로 보기 위해 '생각해'야하며, 생각하기 위해 써야 한다고 했다.  소설가인 그가 '본'것을 생각하고 쓴 글이 독자인 나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하고 졸필이지만 쓰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쓴 글들이 생각의 끝이 되지 않기를 바라고 새로운 대화가 시작되는 지점이기를 바란다고 적고 있다. 

 

소설가는 '세상'을 늘 보고 있다. 우리가 보는 세상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 보는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 사건들, 모양들, 색깔들, 공간들, 관계들, 순간들이 존재해서 그것을 늘 생각하는 일은 무척 번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무척 피곤하다. 그래서 난 늘 걸러버리고, 단순화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역시 소설가는 그렇지 않나 보다.

 

작가는 당연히 책을 많이 읽겠지만 읽는 행위와 보는 행위는 차이가 있다고 정리한다. 작가는 '영화'를 무척 많이 본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 책에도 영화와 관련된 에피소드와 자신의 감상과 상상력을 쓴 글들이 많다. 무척 흥미로웠다. 

 

이제 책을 모두 읽고 마무리한다. 다음 책 '읽다'도 기대하고 있다. 책을 덮으면서 전체 26편의 산문 중 내 공간에 흔적을 남기려면 어떤 작품을 남길까 고민한다. 이른 아침임에도 가장 많이 웃었던 작품은 '앞에서 날아오는 돌' 이다. 슬픔을 느낀 작품은 '샤워부스에서 노래하기'이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두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임에도 연필로 줄을 가장 많이 그었던 글은 '2차원과 3차원'이다. 모두를 옮길 수는 없다. 몇 개의 문단을 메모한다.

 


 

"안나 아르카디예브나는 책을 읽었고 이해도 했지만 읽는다는 것, 즉 책에 쓰인 타인의 생활을 뒤따라간다는 것이 불쾌했다. 그녀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파묵은 이 대목을 길게 인용하면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풍경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소설은 '심리적 3차원'의 세계라고 천명한다. 파묵의 이 언급은 폴 오스터가 영화와 소설을 각각 2차원과 3차원에 비유했던 아네트 인스도르프와의 인터뷰를 연상시킨다. 오스터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문제가 있다"라고 말해 컬럼비아 대학교 영화학과장인 인터뷰어를 도발한다. 무슨 문제가 있느냐니까, 영화는 '무엇보다도, 2차원'이라고 대답한다. 

 

"사람들은 영화를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벽에 비쳐지는 평범한 그림인 영화는 현실의 환영이지 실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이건 이미지의 문제가 된다. 대개 처음에는 영화를 수동적으로 보게 된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이 되면 우리는 영화 속에 흠뻑 빠지고 만다. 두 시간 동안 매혹당하고, 속임수에 넘어가고 즐거워하다가 극장 밖으로 걸어 나오면 우리는 그동안 본 것을 거의 잊어버리고 만다. 소설은 전혀 다르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노력해야 하고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그때는 책 안의 세계가 우리들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냄새를 맡고, 물건들을 만져보고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갖게 되고 자신이 3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알게 된다. "(폴 오스터.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열린책들, 2001)

 

조 라이트 감독의 <안나 카레리나>를 보러 간 날. '영화의 전당' 중극장에는 관객이 반쯤 차 있었다. 상영 중간에 휴대폰을 확인하거나 대놓고 문자메시지를 줄기차게 주고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부스럭거리며 뭔가를 끝없이 먹어대는 관객까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를 보는 마음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안나의 마음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그녀는 소설에 빠져들기를 거부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었던 반면 나는 영화에 빠져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폴 오스터의 말마따나 영화는 이미지로 저 멀리에 있고 팝콘 씹는 소리와 휴대폰의 푸른 빛기둥들은 현실로 가까이 있어 끝까지 서로 섞여들지 않았다. 책을 든 안나는 '무엇이든 직접 체험하고 싶은 마음'에 시달렸지만 나는 아무런 방해 없이 영화에 몰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책과는 달리 영화는 어쩐지 한번 지나가면 돌이킬 수 없는 현실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모스크바행 기차처럼 무지막지하게 달려온다.(124쪽~1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