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70.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Jeeum 2021. 12. 26. 18:56

김초엽 (2019).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1993년생(도현이와 동갑), 화학 전공 소설가. 꽤 여러 군데에서 그녀의 이름을 자주 보았다. '초엽'이라는 고운 이름이 '시인'을 닮아 SF 소설이라곤 생각도 못했다. 첫 번째 단편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에서 2170. 10. 12.라는 숫자를 보던 순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시간에 대한 소설이라는 것을 겨우 알았다. '시초지'라는 낱말이 묘하게 다가왔다. 2170년에 지금의 시간을 시초라고 하고, 내가 사는 땅이 그들의 시초지가 된다니... 그때가 되면 '푸른 별 지구'가 아닌 다른 어딘가가 완벽한 유전자 조합의 인간이 유유자적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되고, 그곳에 사는 청년들이 성년식을 치르기 위한 개고생(?)을 하러 위험한 지구를 순례한다는 이야기. 상상조차 어려운 얘기였지만 읽다 보니 이상하게 사실처럼 다가왔다. 재미도 있었다. 20대가 쓰는 SF 소설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스펙트럼>에는 외계생명체를 탐사하는 할머니 희진의 얘기를 하고 있다. 희진이 우주에서 만난 외계인 '루이'에 대한 이야기, 루이와의 소통에 관한 얘기였다. 외계 생명체의 언어, 특히 '색채 언어'라고 표현된 그것이 무엇일까. 어떤 문법이 어떤 어휘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고 이해되는지 궁금해지고 상상해보고 싶어졌다. 희진이 루이와 같이 사는 동안 어떻게 학습하고, 루이는 희진의 언어를 어떻게 학습해 나갔는지에 대해 연달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 무척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공생가설>은 에일리언을 연상시켰다. 외계 생명체가 인간의 뇌 깊숙이 들어와 같이 산다. 신생아기부터 만 7살이 될 때까지 류드밀라 행성에서 왔을 외계 생명체가 형체 없이 공생한다는 생각. 그들이 우리에게 사랑과 이타심이나 윤리를 가르쳤다는 상상. 기막힌 이야기는 뭉클함이 있었다. 지금도 우리들은 형체도 존재도 모르는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을지도. 그들이 내게 많은 것들을 속삭이고 있을지도.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도 외롭지 않은 것인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안나는 아주 오래전 남편과 아이를 먼저 보낸 우주 행성 '슬랜포니아'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이제 슬랜포니아로 갈 수 있는 수단도 정거장도 없다. 낡은 우주선이 그녀가 가진 전부이다. 그것으로는 슬랜포니아에 가 닿을 수 없다. 자신이 가야 할 곳이 그곳뿐이라 유유히 유유히 우주선을 타고 간다. 안나는 가족을 만날 수도 없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저 간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장면이다. 아주 먼 미래에도 이런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정의 물성> 무슨 소린가 했다. 이모셔널 솔리드에서는 특이한 아이템을 판다. 우울, 분노, 공포를 주는 우울체, 분노체, 공포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물건을 사는 것은 좋아하는 소품이나 향수를 고르는 것과 같은 행위이다. 이럴 때 우리는 대부분 기분좋은 색이나 냄새, 생각하면 행복해질 물건을 선택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울과 분노나 공포체를 많이 사고 팔린다. 정하는 우울체에 빠진 연인 보현의 행동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관내분실> 도서관에서 마인드가 분실되었다고 한다. 미래의 세상에는 종이책이 없다. 도서관은 죽은 자들의 생각과 마인드를 보관하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지민은 임신을 하고 죽은 엄마를 만나러 도서관을 찾는다. 그러나 엄마의 마인드는 사라졌다. 엄마의 마인드를 찾으려면 긴밀하게 연결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새삼스레 유품을 뒤적이며 엄마 은하가 종이책을 편집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좋은 엄마가 아니었으나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 엄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아생전 이해하지 못했던 엄마의 마인드를 찾아 지민은 말한다. "엄마를 이해해요." 은하는 손을 내밀어 지민을 손을 잡아 주었다. 여성은 엄마가 아니다. 그저 사람일 뿐이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가윤은 우주 터널을 넘어갈 우주인으로 선발된다. 가윤이 우주인이 되려고 한 것은 재경이 이었기 때문이다. 재경은 최초의 우주인으로 훈련받아 터널을 넘기 위해 '사이보그 그라인딩'이라는 훈련을 받았다. 출발 전날 재경은 바다로 뛰어 들어 사라졌다. 자신의 영웅이게 그런 숨겨진 사연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가윤은 우주인이 되었고, 재경과 같이 험난한 훈련을 마치고 출발했다. 힘겹게 도착한 새로운 우주는 재경이 말처럼 목숨을 걸고 걸 갈 만큼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윤은 보고 싶었기에 가야 했다. 가끔 우리는 헛된 줄 알면서도 굳이 해야 할 때가 있음을 안다. 거기에 생을 걸 필요가 있을 때도 있다. 허무한 행위조차 굳이 해야 할 때 우리들은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