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연휴도 소설, 2022-8~
임경선(2020). 가만히 부르는 이름, 한겨레출판.
"진정한 어른의 사랑이란 그러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임을 갈수록 확신하게 된다."
'이런 무모한, 이런 대책 없는 작가 보소.' 싶었다. 나보다 네가 아프거나 상처 입을 것을 먼저 걱정하는 마음. 네가 나의 마음에 답해 주지 않아도 기꺼이 내가 먼저 나를 내어주는 마음이라니. 짧은 인간의 일생을 털어 이런 마음을 몇 번이나 가질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을 만날 수는 있을까? 모성애 넘쳐흐르는 엄마가 아닌 바에야. 작가의 소망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근데 나는 왜 이렇게 부정적일까.
이런 사랑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상 사람들이 따뜻해지겠다. 뾰족하게 모나지 않고, 동글동글 말랑말랑, 보들보들해질 듯하다. 자신의 손에 난 상처보다 그 상처를 보는 네가 먼저인 누군가. 그는 누가 보듬어줄 것인가 하는 걱정은 쓸데없는 것일까. 이런 마음이 남녀 간에 가능할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건축설계사 '고수진'은 혁범에게 그런 사람이고, 식물 전문가 '한솔'에게 '수진'이 그런 사람이다. '혁범'은 다소 이기적 사랑을 하는 보통 남자. 가장 인간적인 느낌의 인물이다. 20대의 남자인 한솔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작가 말처럼 아직 세상에 데어본 적인 없기 때문이다. 완전 공감이다.
하지만 <가만히 부르는 이름>을 생각해본다. 내게도 가만히 불러보고 싶은 남자가 있다. 그는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에게도 말하고 싶다. "How's Life treat you?".
임경선 (2016). 나의 남자. 예담.
소설가 '한지운'은 남편과 아들을 가진 사람이다. 예상치 못했던 비가 오던 날. 카페 주인 '성현'에게 우산을 빌리게 된다. 우산을 돌려주려 찾은 카페. 지운은 매일 카페로 출근하며 글을 쓴다. 자연스레 성현과 가까워진다.
남편과 아들과 함께하는 삶에 지운은 불만이 없다. 그럼에도 성현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빠지는 것이므로.' 그저 사랑만 보고 달려드는 여자. 그런 자아가 크게 없는 나는 괜히 소설 속 지운이 용감하다 못해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재밌게 읽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용감한 사랑을 대신해주는 지운이 좋다.
임경선의 글이 참 좋다. 장편소설 '나의 남자'에서도 아주 적절하게 쓰인 부사와 형용사들을 발견했다. 딱 맞아떨어지는 낱말들이 감칠맛을 낸다. 감히 성현을 '나의 남자'라고 하는 지운의 용감한 사랑에 박수를 보낸다.
임경선 (2018). 곁에 남아있는 사람, 위즈덤하우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담긴 소설집. 시기적으로 '다정한 구원'이 나오기 전 소설집인 것 같다.
<곁에 남아있는 사람>
늦게 선택한 결혼이었으나 파혼해버린 최영미에게는 대학 기타 동아리에서 만난 첫사랑 준호가 있다. 준호는 이미 결혼을 했다. 전업주부가 되어 지적장애 딸을 키운다. 준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준호는 항상 영미를 찾는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주는 아내의 곁에 머무른다.
이제 최영미는 질긴 사랑에게 이별을 고한다. 슬프고 그리운 날도 언젠가 끝이 날 것을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만다. 영미의 곁에 남은 사람은 누구인가
<치앙마이>
서희진 교수가 태국 수안나폼 공항에서 사랑했던 영욱의 딸 슬아와 우연히 만나 나눈 얘기는 소설이 되었다. 그토록 완벽한 순간에 이별을 예감했던 젊은 날의 사랑. 태국 최초의 국립병원 시리랏 의학박물관에 대한 묘사가 섬찟했지만 흥미로웠다. 박사 과정생이던 어린 날, 뇌신경외과 의사였던 영욱과의 운명적 만남. 영욱의 이혼으로 결혼까지 했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다. 대체 사랑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우리가 잠든 사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혁은 엄마와 함께 유후인으로 온천여행을 떠난다. 짧은 여행을 하는 동안, 칠순을 앞둔 엄마와 오래동안 떨어져 살아온 무뚝뚝한 아들 사이에 나눈 잔잔한 이야기들.
문득, 여행이 그리워졌다. '테레비전도 시계도 없었다. 어둠이 내리면 잠자리에 들고 해가 비추면 깨어나듯이, 자연의 리듬과 속도에 맞춰 푹 쉴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였다.'라고 적힌 유후인에 가고 싶어졌다.
<keep calm and carry on>
피트니스 센터 트레이너 주완은 성실하고 정석대로 일하는 사람이다. 방문 PT로 정원을 만난다. 정원은 유방암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여인이다. 부유한 정원에게도 불행은 피해 가지 않는다. 정원은 악착같이 성실하게 삶을 부여잡으려 한다.
'혼자 열심히 버티면서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주변에서 그걸 당연하게 여기더라고요. 강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구나 싶어서 요즘은 자주 인생을 돌아보게 되요.' '한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제대로 된 삶이라는 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기준이 다 다른 것 같아요. 주관적이죠. 이게 맞는 길인지, 내가 원했던 길인지 스스로 질문해 가면서 찾아갈 뿐이에요. 그 과정 자체가 인생이 아닐까 싶어요.' 라도 정원은 말한다.
'지금 당신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길 바란다.'고 작가는 마무리했다. 설날 연휴 동안 임경선의 소설과 산문집과 함께 했다. 그녀의 글은 언제나 부드러운 가면을 쓰고 날카롭게 나를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