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그리고 친구
가족 그리고 친구
2007년 1월 2일, 바람 시리던 날, 깊어진 병을 이기지 못하고 아버지가 멀리 가셨다. 사는 동안 자신의 고집대로 하신 탓에 아버지는 자주 엄마를 힘들게 했다. 당연히 부부간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버지가 안계시면 엄마가 오히려 밝은 일상을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기도 할 만큼.
그해 겨울, 삼형제는 소박한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르고 49제까지 모두 마쳤다. 겨울바람이 잔잔해졌다. 거실로 들어서는 햇빛이 봄이 오고 있음을 전해주었다. 내일이면 개학이다. 겨울방학동안 집안일을 핑계로 겨울잠을 자듯이 엄마와 함께 집에만 있었다. 내일부터 이제 바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3월 1일, 아침을 먹고 조카들과 따뜻한 햇살 속에 뒹굴고 있었다. 갑자기 엄마가 말을 꺼냈다. “내일이면 이제 개학이네. 네가 출근하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나는 어떡하지?” 아픈 아버지가 안계서 홀가분하실 줄 알았던 엄마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어떡해?” “강아지 한 마리라도 있으면 좋겠네.” 난데없이 강아지를 찾는 엄마가 뜬금없었지만 겨울을 나는 동안 가라앉은 내 가슴에도 옆지기를 멀리 보낸 엄마의 아릿한 아픔과 허전함이 전해져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다 했던가? 사이좋지 못했어도 짝을 잃은 외로움이 깊었나보다.
엄마와 두 명의 조카를 태우고 반월당으로 나섰다. 이집 저집 돌아다니다 엄마의 눈에 꼭 차는 하얀 말티즈 수놈을 데리고 왔다. 삼일절에 데리고 와서 ‘삼일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조카들이 촌스럽다고 놀리는 바람에 그들의 바램대로 ‘또또’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날부터 채 400그램도 안 되는 또또는 엄마의 친구가 되었다. 또또가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주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엄마는 또또를 가족으로 친구로 받아들인 듯 했다.
또또는 품위 있는 강아지였다. 방바닥에 그냥 앉는 법이 없었다. 누군가가 앉으면 어김없이 무릎에 우아하게 올라앉았다. 당연히 아무데나 누거나 싸지 않았다. 부르면 와서 안길 줄도 알았다. 따라다니는 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려움 없이 엄마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엄마는 강아지와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다니고, TV를 보았다. 어린 강아지가 건강하고 깔끔하게 자라도록 챙기고 먹이고 살펴주었다. 텅 빈 집에 더 이상 엄마 혼자가 아니어서 큰 걱정 않고 마음 놓고 일을 했다.
그렇게 오래 같이 살줄 알았던 강아지는 집에 온지 2년 6개월 만에 아프기 시작했다. 작은 경련으로 시작해서 끊임없이 심한 경련에 힘들어 할 때까지 족히 일 년이 넘는 시간을 투병했다. 작은 몸짓이 떨릴 때마다 엄마도 힘들어 했다. 안락사를 시킬 때까지 힘겨운 시간을 함께 했다. 그것이 2010년 겨울의 일이다. 강아지가 아파서 힘들어하는 동안 그것을 지켜본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모른다. 아픈 강아지에 신경 쓰느라 나도 형제들도 엄마가 변해가는 걸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엄마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2011년 봄, 엄마는 알츠하이머로 진단받았다. 엄마의 병은 노화가 큰 이유이다. 늙는 다는 것, 앞으로만 달려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가운데 누군가는 아플 수밖에 없다. 그러나 평생의 짝이었던 아버지와 그의 빈자리를 대신한 친구였던 또또의 연이은 투병과 죽음을 지켜본 힘든 경험이 막 70대에 들어선 엄마로 하여금 기나긴 삶에 대한 의미를 버리게 했을지도 알 수 없다.
가족은 하늘이 준 친구요, 친구는 인생이 준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엄마에게 아버지가 하늘이 준 친구 같은 가족이었다면, 또또는 그 친구가 떠나면서 만들어 준 가족이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전부라고 알고 살아온 엄마에게 가족과 친구를 차례로 하나씩 잃어버린 엄마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그 아픔을 망각 속에 녹여 하나씩 놓아버림으로서 삶의 고통을 잊어버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가슴이 저려온다.
엄마는 이제 누워서 지낸다. 그러나 요양병원을 나올 때 잃어버렸던 말도 다시 하고, 고집쟁이 아기지만 가요무대를 보면서 즐겁게 지낸다. 새로운 친구도 생겼다. 그 친구가 엄마에게 말도 다시 찾아주고, 자식들이 없는 시간동안 운동도 시켜주고 식사도 같이 해준다. 엄마의 새 친구는 간병사 선생님이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어려운 알츠하이머 치매 노인이 간병사 선생님의 이름을 금새 학습했다. 누가 오냐고 물으면 ‘전영숙’이 온다고 한다. 기적이다. 기적을 가져다준 새로운 친구는 누가 보내준 것일까? 감사할 따름이다. (2019.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