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뎌 다 심었다
그렇게 비가 안 오더니 지난주는 두 번이나 비가 왔다. 촉촉해진 땅에 멀칭 비닐을 씌워 세 개의 두둑을 만들어 두었다. 이제 거기에 가지, 오이, 토마토, 깻잎을 심으면 된다. 올해는 토마토를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은데.. 내가 가꾼 토마토로 파스타를 해 먹고, 홀 토마토를 만들어 보관해두고 싶은데... 자신이 없다.
토요일 아침. 운동 삼아 밭으로 나갔다. 부지런한 농부는 이미 새벽부터 밭을 가꾸고 있었다. 그에게 여러가지 도움을 받고 있다. 이제 남은 땅에 더 늦기 전에 심으라는 말을 듣고, 번개시장으로 갔다. 그의 조언대로 좁은 두둑에 땅콩을 심어보기로 했다. 땅콩 20포기, 오이 6포기, 가지 4개, 토마토 6개, 들깻잎 모종 6개, 그리고 '환경 아낌이' 조카가 심어 달라는 수세미 2개를 샀다. 근처의 꽃시장 들러 이윤정 교수의 요청대로 로즈메리를 4포기 샀다. 밭 둘레 '수국' 옆에 심어보려 한다. 제주 인디언 키친처럼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다. 밭에 심을 거라 했더니 맘씨 좋은 주인이 제비꽃 하나를 덤으로 주었다. 잘 자라주면 그녀를 초대해도 좋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 상자를 들고 나갔다. 아참 로즈메리를 잊어버리고 베란다에 두고 왔다. 로즈메리는 다음 주에 심기로 하고 대신 미리 거름을 뿌려두어야겠다. 일요일 아침 8시 밭으로 가는 길에 강물이 햇살에 반짝거렸다. 이런 맛에 텃밭 농사를 3년째 하고 있다. 밭에도 새와 바람 소리만에 흘러 다니고 있었다. 지난 한 주 어수선 그 자체였던 학교에서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씻겨 나가는 느낌이다. 자유로워지는 기분. 그래 이런 날, 이런 시간 때문에 나는 여전히 잘 살 수 있다. 자신감이 조금씩 솟아났다. 다행이다.
세로로 길게 나있는 나의 밭에는 좌우로 감자와 양파가 심겨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이동 불가능한 부추밭, 이어서 케일과 루콜라 등의 잎채소 밭이 있다. 고추를 한 줄 심어 두고 그 사이에 세 개의 두둑이 남아있다. 오늘은 여기에 사 온 모두를 심고, 지지대를 세워줄 것이다.
가장 먼저, 고추밭 옆에 땅콩을 심었다. 땅콩을 심을 예정이었으면 고추를 심어놓은 곳에 땅콩을 심는 게 바람직했다. 하지만 어쩌랴. 잘되든 못되든 자연의 선택에 맡기는 수 밖에. 검은 비닐에 이쁘게 구멍을 내고, 20포기의 땅콩을 가지런히 심었다. 처음에는 이 구멍을 이렇게 뚫지 못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실수를 거듭하며 나는 성장하고 있다. 하하.
땅콩을 심고나니 왠지 뿌듯해진다. 비닐 안에서 수분을 잔뜩 품고 포실포실해진 흙을 만지는 느낌. 나는 참 좋다. 이 흙의 느낌이. 그렇다고 내가 진짜 농부가 된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면서 이런 느낌을 모르고 죽는 것은 불행한 것이다. 다들 적어도 한번 느껴보면 좋겠다. 어느새 '호두나무'에 열매가 달렸다. 자연은 참으로 부지런하다. 작은 열매가 자라 스스로 검게 변해나가며 품 안에 단단한 호두 알갱이를 만들 것이다. '소리 없는 헌신'. 호두의 작은 열매를 보며 생각한다. 진정 귀한 것은 아픔을 견디며 생명을 자라게 하는 용기. 기꺼이 자신을 바치는 진정한 용기를 생각한다.
이제 옆에 토마토를 심는다. 그냥 토마토 둘, 방울토마토 넷. 옆에 들깻잎 모종 6개. 작년에 깻잎을 한줄이나 심었다. 엄청난 수확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웃에게 나눠주고, 깻잎 페스토도 만들고, 깻잎 김치도 만들었지만 결국은 풀벌레들에게 나눠주는 것으로 끝이 났다는 말씀. 텃밭에 다양한 식물을 심고, 필요할 때마다 조금씩 따서 먹는다는 것은 이상에 가까운 이야기. 현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이 왕창 나온다는 사실. 따라서 욕심을 내어 많이 심어도 결국은 버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욕심을 버린다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다.
마지막으로 오이와 가지를 심었다. 오이는 넝쿨식물이어서 높은 지지대로 세우고 올라갈 수 있는 스케폴딩 즉 비계를 잘 세워주어야 한다. 선을 따라 지지대를 따라 무수히 많은 손들이 뻗고 꿏이 핀다. 꽃이 진 자리에 오이가 자란다. 오이와 가지는 여름내 많이 따먹는다. 오이는 그냥 먹어도 맛있고, 무침도 볶음도 냉채도 정말 맛있다. 가지는 말할 것도 없다. 유달리 나는 가지가 좋다. 가지는 가장 한국적인 재료이지만 가장 서양요리에도 좋은 재료이다. 가지와 양파에 토마토를 듬뿍 넣어 만든 '부르스케타'는 내가 가장 즐기는 음식이다. 올해도 내 밭에서 난 토마토와 양파와 가지로 듬뿍 만들어 와인과 함께 먹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배가 부르고 마음도 부르다. 너~~ 무 좋다. 오이야. 가지야. 양파야. 잘 자라주렴.
부추 만두를 만드려고 적당하게 잘라낸 부추밭에는 아직도 이렇게 부추가 남아있다. 작은 어린 싹들이 줄을 맞춰 잔뜩 피어난 것이 귀엽다. 감자고 잎이 무성해져 있다. 빨리 꽃을 핀 것들은 꽃이 잘라주라 한다. 완두콩도 덩굴식물이라 끈으로 비계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키가 크기 전에 좀 더 묶어주어야겠다. 비닐도 안치고 심어놓은 케일이 가뭄에 죽을까 봐 걱정했는데 요렇게 싱싱한 이파리가 나와있다. 지난겨울 뿌린 씨앗에서 자란 상추도 이렇게 무성하게 자라 오른다. 좀 더 크면 이웃들과 동료들과 나누어야겠다. 식물을 가꾸는 재미는 이런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