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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부록 : 구상 중

Jeeum 2019. 10. 14. 21:19

내 인생의 부록 : 구상 중



 

초가을 아침 햇살이 토요일 아침을 깨운다. 작은 내 서가에 꽂힌 책들을 무심히 둘러본다. 키 다른 책 사이로 어울리지 않는 잡지가 눈에 띈다. 미세한 먼지가 묻어나는 그것을 꺼내 본다. 이것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버리지 못하고 꽂아둔 이유가 아득하다.

 

신년 가계부를 얻으려고 여성지 신년호를 기필코 샀던 시절이 있었다. 언제나 석 달도 채우지 못하고 버리기 일쑤였던 가계부를 그저 갖겠다고 기를 썼다. 돈을 주고 기꺼이 살만큼 즐겨보지도 않으면서 본 책보다 부록인 가계부가 탐이 나서 매년 어김없이 사곤 했다. 신년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갖기 위해 스티커의 수를 헤아리며 별다방 커피를 열심히 마시는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부록은 책이나 잡지에 딸려오는 덤 같은 존재이다. 가끔 그 덤에 오히려 욕심이 간다. 덤을 얻으려고 불필요한 지출도 한다.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나도 열심히 보았다. 드라마가 끝이 나니 아쉬웠다. 때마침 출시된 CD를 샀다. 두 장의 CD에는 드라마의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아름다운 음악이 영상과 함께 들어 있었다. 거기에 세련된 포스터에 사진집, 아기자기한 작은 소품들까지 부록으로 잔뜩 들어있었다. 가격은 비쌌지만 부록을 보는 재미가 쏠쏠해 퇴근 후 한동안 그것들을 즐기느라 시간을 보냈다.


내 삶에 있어 연분홍 치마 같던 봄날은 갔다. 가을을 넘어 겨울이 가까워졌음을 고백한다. 봄날이 갔음이 아쉬워지는 날은 슬프다. 찬란해서 영원할 것 같았던 봄날, 미친 듯이 시간을 아껴 공부했다. 공부를 하는 것이 가장 즐겁고 뿌듯했다. 공부를 통해 삶의 안정을 얻었다. 직장을 구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 직장에서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일을 했다. 일을 하며 존재를 확인했다. 그러다 어느새 나는 바람에 떨어지는 빛바랜 낙엽 같은 나이가 되었다.

 

반 백세에 들어서자마자 불쑥 아팠다. 직장에서는 큰 업무의 책임에서 살짝 벗어나 있던 시간이었다. 여유를 누릴 틈도 없이 느닷없이 아프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허리 통증을 이겨내고 나니 수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만큼 말하기가 고통스러웠다. 갑상선에 이상이 생기고 심한 두통이 이어졌다. 그런 아픔이 봄부터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류마티스 관절염 증상까지 나타났다. 육체의 고통은 삶을 바스락거리게 했다. 약해진 몸을 부둥켜안고 조심조심 시간을 건넜다. 다행스럽게 안정이 찾아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내 삶의 한 과정이었다. 그렇게 가을이 오고 다시 가고 있다.

 

계절이 바뀌듯 나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이야기의 본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매일 치열하게 살고 있다. 허나 내 삶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도 이제 서서히 끝이 보인다. 이야기의 끝에는 산뜻한 별책 부록 하나 만들고 싶다. 소박한 부록일지언정 탐을 내는 누군가가 있으면 더욱 좋겠다. 그렇게 겨울로 떠나고 싶다.

 

나는 여행을 즐긴다. 엄마가 아프기 전에는 더욱 자주 떠났다. 조직에 메어있는 사람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시간의 틈을 조각내어 떠나는 여행에는 여유가 별로 없다. 여유를 찾고자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어 바쁘다. 무거운 가방을 끌고 낯선 곳을 터벅거리며 걷다 엄청난 자연에 놀라고, 어디에나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곳의 일상에서 따뜻한 호흡을 얻기도 해서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느슨해진 내 삶에 쫘아악 균형이 잡히기를 소망하며 보따리를 싸곤 했다.

 

오랫동안 생각했다. 돌아다니지 말고 머물러보고 싶었다. 여행비자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의 한계는 대략 90. 석 달을 낯선 곳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고 자란 익숙한 땅과 물을 떠나 언어도 역사도 사람의 생김새도 다른 어떤 곳에서 혼자서 머물러 살아보기. 마을을 터전삼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그 속에서 혹시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을 사진으로 남기고 글로 써보기. 지금껏 써온 논문과는 아주 다른……

 

뭔가 이루기 위해, 남에게 뒤쳐지지 않기 위해, 보다 나은 삶을 누리기 위해 달려오고 달리고 있는 여전한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 그 부록을 이렇게 구상 중이다. 건강이 허락되는 한 그렇게 해보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 일찍 일을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한다면 그럴 작정이다. 이야기의 본문이 유성처럼 빛났다 이미 사라진 시간이었다면, 나의 부록은 잔잔하지만 오래 빛날 시간으로 남고 싶다. 소박하지만 초라하지 않게 만들어 볼 생각이다. 어딘가 머물러 조심스레 연락하면 기꺼이 찾아와 함께 해 줄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다. (2019. 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