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2. 7. 12. 09:38

2022-43

 

조남주(2011). 귀를 기울이면, 문학동네.

 

할 말이 많으면 누구나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할 말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 걱정이다. 할 말은 너무 많아도. 누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지 않아.

 

14층 아줌마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지나치게 떠들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끔 너무 많이 떠들어 미쳤다고 생각하고 아예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 밤 불쑥 분리 쓰레기를 잔뜩 들고 집 밖으로 나와 쓰레기는 안 버리고 혼자 떠들다 '긴급 입원'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말은 꼭 해야할 말이었을까. 누구나 해야 할 말은 해야 하니까. 그녀도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인데 우리가 그 말을 들어줄 수 없어 그녀가 아픈 것은 아닐까. 혼자 말을 하다 못해 쓰레기 분리를 핑계로 집 밖으로 들고 나왔던 그녀.

 

그녀처럼 소설가란 해야 할 말들이 많아진 사람들일까? 이제 막장으로 대놓고 얘기를 해보려는 것일까?  2011년 조남주가 작가로 등단해야할 만큼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바보라 불리는 소년 '김일우', 세상 모든 엄마가 그렇듯 유일하게 일우를 바보라 부르지 않는 엄마 오영미, 아빠 김민구, 현대사회에서 가장 많은 모양새의 가족의 원형이다. 이들에게는 돈이 부족하다. 

 

한물 간 세오시장의 사람들. 그 중 번듯한 대학을 나오고도 아버지의 건어물 가게를 물려받을 수밖에 없었던 정기섭. 시장을 살려보겠다고 좌충우돌 돌진해본다. 그나마 땐땐한 마누라 덕분에 먹고사는 걱정은 크게 안 하는 듯하다. 정기섭에게는 언제나 가오가 부족하다.

 

박상운. 한때는 공영 방송사 잘나가는 PD였지만 방송사고로 그만두었다. 작은 외주 제작사를 운영하는 명색의 사장이지만 언제나 을로 참고 산다. 자식은 없고 아내는 유학 중이다. 유학비를 꼬박꼬박 보내며 남편의 역할을 하고 있다. 프로그램 제작자로서 능력은 탁월해 보이는데 박상운에게는 운이 없고, 시간도 없다.     

 

세상의 약자로 전전긍긍 살아가는 이들이 '더 챔피언'이라는 야바위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모여 들었다. 시장 살리기로 시작한 선한 의도는 결코 어떤 일도 제대로 끝내 보지 못한 귀신이 붙은 인물들이 한없이 몰려드는 바람에 거대한 사기극으로 달려가고 있다. 그 중심에 바보 김일우가 있다. 

 

김일우는 보통 사람이 듣지 못한 역치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었다. 그야말로 귀가 좋아도 너무 좋은 거다. 자식의 너무나 좋은 귀를 이용해 일확천금을 벌어보겠다고 민구와 영미는 계획한다. 그러나 욕심으로 시작된 계획이 목표를 이룰 리 없다. 오억이란 상금이 눈앞인데 일우가 알 수 없는 이유로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버렸다. 목숨은 건졌으나 아이는 더 바보가 되었다. 

 

일우는 이제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대신 소리가 아닌 소리를 듣는다. "김일우에게는 이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사방을 둘어싼 붉은색이 말했다. 이곳은 건강하지 않다. 불안하다. 위험하다. 박상운에게서는 가느다란 새의 발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고, 편성부장에게서는 신문지처럼 얇은 종이가 불에 타는 소리가 났다. 기자회견장에 모인 사람들에게서는 모래벽이 무너지거나 떨어지거나 철이 녹스는 것 같은 소멸의 소리들이 났다."(294쪽). 이제 일우는 이런 소리들을 들린다. 그러나 말은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들리는 것들은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다만 들리는 소리를 듣고 있을 뿐이다. 그 소리들은 일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순간 김일우는 여기가 어디고 자신이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잊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붉은 방.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았다. 슬퍼, 불쌍해, 한심해. 이제 나는 어떻게 될까. 뭐가 될까. 그때 멀리 어딘가에서 쾅하고 커다란 빛이 터졌다. 순간 김일우의 심장도 펑하고 터졌다. 심장이 터지며 가슴속에서 수리가 들렸다. 도망쳐!"(297쪽)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게 된 일우. 일우의 행동이 마치 동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소설의 내용이 우화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 조남주가 굳이 소설가가 되어야 하고, 소설을 쓰고, 책을 내고픈 까닭의 원형 혹은 생각의 실루엣이 내게 살짝 보였다. 작가가 하고픈 얘기는 이후 2016년 '82년 김지영'으로 성장하고, 2018년 '그녀 이름은'으로 진화되었다. 드디어 2022년 '서영동 이야기'가 나왔다. 서영동 이야기를 읽고싶어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2011년 제17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했을 때 수상 소감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을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이 '딸'이라 했다. 어느 방송에서 '82년 김지영'에 대한 작가의 말에서도 그녀는 딸을 언급했었다. 딸에 대한 직접적인 얘기를 한 것은 아니다. 딸을 키우며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했을 뿐이다.

 

내게는 이렇게 들린다.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그 딸보다 빠른 시간을 살아온 여성으로 딸에게 하고픈 이야기가 내게는 너무 많아, 딸이 귀 기울여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도 너무 많아. 입으론 다하지 못할 것 같아. 그래서 소설을 쓸거야. 잘 들어줘. 딸'이라고.

 

나도 조남주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소설의 제목처럼 '귀를 기울이면' 더 많은 것들이 들릴지도 모르니까. 때로 그것이 괴로움이고 고통일지라도 사랑의 다른 이름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귀를 기울여 보는 노력을 할 것이다.

 

오늘의 소설은 참 읽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