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밖에
감자를 캐고 빈 땅에 거름을 주고 쉬게 했다. 선선해지면 여기에 배추와 무를 심을 생각이다.
더운 날은 계속되는데 일상을 처리하느라 뒷전이 된 밭에서 싱싱하게 자라던 열무와 얼갈이배추가 말라버렸다. 뒤늦게 물을 듬뿍 주고 비도 내려 기대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수확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양은 얼마 안 되지만 이것으로 담은 물김치가 이제 맛이 들었다. 올케가 만들어준 것도 맛있었는데... 내가 직접 담은 것도 그나마 먹을만한 것 같다. 양이 적어 여기저기 나눠주기 민망하다. 그냥 혼자 먹어야겠다.
가장 기대했던 토마토가 망했다. 오이에도 병이 생겨 다자란 몇 개를 제외하곤 더 이상 싱싱한 오이가 달리지 않는 것 같다. 고추도 시원찮다. 농사 전문가는 000병이라고 말했지만 낯선 단어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수가 적어도 굵은 토마토가 달려 붉게 익어주기를 고대했지만 주인이 무심한 동안 그나마 익었던 토마토도 새들의 밥이 되고, 푸른 토마토들은 보기에도 흉하게 아파 보였다. 날씨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더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탓이다.
그나마 이제 땅콩만 남았다. 처음 심은 식물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잘 자라고 있다. 흙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해서 그리 해주었다. 기대했던 토마토로 인한 실망감을 땅콩으로 다스려본다. 9월에는 내가 가꾼 땅콩이 수확될지도 모를 일이다. 끝까지 지켜봐야 한다.
남은 오이를 땄다. 가지와 고추도 땄다. 부추를 잘라왔다. 오이소박이를 담았다. 깻잎으로 깻잎 물김치도 담았다. 웹서핑을 하다 레시피를 보고 따라 했다. 작년 깻잎이 한꺼번에 많이 날 때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아돌아 사실 어떻게 처치할지 곤란했었다. 작년에 담은 깻잎 김치가 아직도 냉장고에 남아있다. 그래서 물김치를 보곤 눈이 확 뜨였다. 혹시나 해서 조금만 먼저 담아보았는데 생각보다 맛이 있다. 여름철 반찬으로 제격이다.
당근이 남아있다. 씨를 꽤 많이 뿌렸는데 가뭄에 살아남은 것들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은 당근은 씩씩하게 자라고 있다. 잎채소들은 정리하고 남은 곳에 다시 당근과 열무 씨앗을 뿌렸다. 장난기 많은 날씨에 싹이 날지 의문이지만 마음을 주고 지켜보고 있다. 붉은 상추를 베어나고 청치마 상추 씨앗을 뿌렸더니 조금씩 자라고 있다. 가득했던 밭이 드문드문 공지가 났다. 아담하게 참하던 들판이 둘쑥날쑥 삐뚤빼뚤 모양새가 모나 버렸다. 하지만 모양새가 이쁘지 않아도 여기에는 여전히 작은 생명들이 숨 쉬고 있다. 거친 햇살에 괴롭고, 때를 맞춰 내려주지 않는 비에 갈증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뿌리내린 여기 작은 대지에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