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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도 가지가지

Jeeum 2019. 11. 3. 14:31

착각도 가지가지

 

26기 박미혜

 

 

작은 거미 한 마리가 핸들에 집을 짓고 있다. 운전을 한참 하고서야 겨우 알았다. 자그마한 거미여서 징그럽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자연을 마다하고 하필 남의 자동차 핸들에다 집을 짓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터라 녀석이 실로 집을 짓는 것을 어쩔 수 없이 한참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성실한 초등학생 같은 모습이 측은하기도 했다. 하필 이 곳일까? 살 곳을 착각한 것은 아닐까? 휴게소까지 잘 데리고 가서 고이 내려 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터전을 착각한 거미에게 세상은 의도치 않게 잔인했다. 휴게소로 들어서느라 핸들을 우측으로 돌리는 순간 중력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거미는 떨어지고 말았다. 차를 세운 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뒤져 봤지만 찾을 수 없었다. 하고 많은 장소를 두고 나의 자동차로 스며든 작은 거미의 삶이 안타깝다.

 

어린 곤충이 터를 잘못 찾는 바람에 채 어른이 되기도 전에 사라지고 말았다. 시간이 더 지나 자동차 안에서 녀석의 집을 다시 만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먹을 것도 없는 낯선 공간에서 작은 벌레가 계속 버틸 수 있을까. 녀석의 삶을 기약할 수 없다.

 

사진을 보며 화들짝 놀란다. 거울을 안보고 사는 것도 아니면서 막상 사진 속의 나를 보면 그저 놀라고 만다. 생각 속의 나와 사진 속의 내가 너무 다르다. 잊고 살다가 사진 속의 나를 만나면 잔인한 세월이 가슴을 헤집는다. 언제부턴가 사진 찍히는 일이 싫어졌다. 허나 청춘들과 일을 하다보면 아무리 피해도 함께 앵글에 잡히는 일이 있다. 사진을 보여주며 학생이 말한다. “교수님, 너무 동안이세요.” 잔뜩 기대를 하며 들여다본다. 착각은 자유다. 기대와 현실은 언제나 거리가 멀다. 대놓고 표낼 수도 없다. 돌아서서 혼자 성질을 낸다.

 

그래서 잊고 살기로 했다. 착각이라도 그게 자유롭다. 굳이 확인할 필요가 무에 있는가? 부러 확인하지 않아도 몸도 얼굴도 이미 이전과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년 여성이 자신에 대해 갖는 이러한 의도적인 착각은 가끔 일상을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매일같이 각종 영양제에 석류즙을 알뜰히 챙겨먹으면서 여전히 날씬하고, 탱탱한 피부를 가졌다고 믿는 마음은 특히 사람들이 많은 공간에서 허리와 등을 꼿꼿하게 세워 준다. 비록 더 이상 하이힐을 신을 수는 없지만 굽 낮은 로퍼를 신어도 자신감 있게 걷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침대에 누워 생활하는 엄마가 손으로 나를 부른다. 가까이 가 들어보니 온정재가 장가를 간대.” 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했다. 손으로 맞은편 벽에 붙은 달력을 가리킨다. 순간 웃음보가 터졌다. “맞네. 우리 엄마. 온정재가 장가를 가네. 세상에 언제 가노 했더니~. 하하하하우리 엄마 엄청 똑똑하다. 커다란 그 달력 아래 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온정재가장기요양센터

 

수면 부족을 달래느라 비실거리는 토요일 오후. 울 엄마의 읽기 착각이 나를 웃게 했다. 잠이 확 달아날 것 같은 행복이다. 먼 훗날 이 날의 일을 기억하면 밋밋할지도 모를 내 노년의 어느 순간이 환해 질 듯하다.

 

착각은 역시 가지가지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착각은 때로 위험하다. 지혜롭게 세상사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착각에 기대어 어려운 삶에서 피할 수도 있다. 부처님 손바닥 같은 세상에서 달아나봐야 거기서 거기겠지만 가끔 직면하기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우리는 주문처럼 기도처럼 스스로 착각을 유도하기도 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을 가고, 성실하게 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 믿는 것처럼……

 

때로 착각이 유머가 되어 생기를 주기도 한다. 인지장애 엄마와 사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흔히 고생이 많다고들 한다. 생각해보면 고달픈 일도 많다. 특별한 일이 아니면 주말은 언제나 엄마와 같이 있어야 하니 가끔 답답하기도 하다. 출장이나 여행이라도 가려면 누군가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시간을 빌려야 한다. 그렇다고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늘 같은 엄마의 말은 그것이 비록 오류이고 착각일지라도 내게 힘을 준다. 멀지않은 나의 미래에 깨소금 같은 고소한 양념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좋다. (2019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