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알로하, 나의 엄마들

Jeeum 2022. 8. 8. 16:34

2022- 53

 

이금이(2020). 알로하, 나의 엄마들, 창비.

 

1917년 김해 어진말, 버들 아기씨는 친구 홍주, 송화와 함께 포와(하와이)로 사진 신부가 되어 떠난다. 양반댁 딸로 태어났으나 의병을 하던 가장이 죽고, 오빠마저 죽은 버들의 가정은 엄마의 몸부림으로 근근이 힘겹게 산다.

 

버들은 사진신부가 되어 새 세상에서 공부하고 살아가고 싶다. 당장 발아래 운명조차 알 수 없던 시절이어서 일까. 어딘지도 모를 세상에 과감하게 부딪치는 용기는 어디서 생기는 걸까?

 

어려운 시절일수록  지혜와 용기가 샘솟는 것일까? 그 시절을 살아보지 않은 내가 알 수 없다. 문장으로 읽기만 해도 벅차오르고 심장이 벌렁거린다. 가슴이 쓰라리면서도 웃게 된다. 산다는 것은 이런 거지.....

 

버들의 친구 홍주는 대찬 여성이다. 작은 희로애락쯤 삶의 양념쯤으로 여긴다. 고통스러운 순간에 오히려 허허 웃어버리며 밀려드는 파도를 즐기는 홍주. 무녀의 딸로 태어나 돌팔매질을 받으며 살았던 송화. 어린 송화의 삶이 가여워 할머니 무녀는 손가락질 받지 말고 살라고 새 세상으로 어린 손녀를 보낸다.

 

하와이로 가는 길은 멀고도 고달프지만 버들, 홍주 그리고 송화가 있어 견딜만하고, 차라리 소풍 가는 것 마냥 때로 즐겁기조차 하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하와이는 꿈처럼 달콤한 곳이 아니다. 나이와 능력을 속여 결혼하고자 한 남자들이 기다리는 곳. 고생은 합동결혼식이 끝나고 뿔뿔이 헤어지면서 시작한다. 예정인지 필연이진 우연이지 모를 각자의 새로운 운명이 기다린다. 시간은 흘러 하와이의 고된 삶에서도 진짜 아내와 남편이 되고, 가족이 되고, 이웃이 되고 엄마가 된다.   

 

고된 여성들의 삶의 개척사 같은 이야기지만 하와이의 초기 이민자들의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과 노력. 이민자로 살기에 더욱 중요했던 조국의 독립. 때문에 어긋날 수 있었던 개인의 삶. 죽음과 상처만 남은 독립운동. 하와이의 독립운동사.

 

혼자가 된 버들과 홍주, 송화는 처음으로 여유와 자유를 누린다. 그들은 하와이 와이하이섬 센셋 비치에서 산처럼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본다. 파도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달려드는 젊은이들을 바라본다. 파도가 사라진 물보라에는 무지개가 선다. 마치 자신들의 인생 같은 파도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호를 따라 펄이 아장아장 돗자리 밖을 벗어났다 버들보다 송화가 먼저 일어나 아이들을 따라다녔다. 홍주는 운전하느라 진이 빠졌는지 조용히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버들은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 있어도 마음 편한 시간이 눈물 날 만큼 좋았다. 그때 홍주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 저 아들이 꼭 우리 같다. 우리 인생도 파도타기 아이가."

아이들과 송화를 좆고 있던 버들은 홍주가 하는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홍주 말대로 자신의 인생에도 파도 같은 삶이 고비가 수없이 밀어닥쳤다.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 그 뒤의 삶, 사진 신부로 온 하와이의 생활....... 어느 한 가지도 쉬운 게 없었다. 홍주와 송화가 넘긴 파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젊은이들 뒤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파도를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바다가 있는 한 없어지지 않을 파도처럼, 살아 있는 한 인생이 파도 역시 끊임없이 밀어닥칠 것이다.

 

버들은 홍주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저쪽에서 아이들을 송 따라다니는 송화를 바라보았다. 함께 조선을 떠나온 자신들은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섰다.(326쪽)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버들의 남편 태완은 몸이 상해 돌아온다. 같이 산 세월보다 떨어져 산 날이 긴 가족이 다시 가족이 되는 것에도 어려움은 있다. 다시 가족은 늘어간다. 삶이 안정되어 간다. 다행이다. 이대로 해피엔딩이면 좋으련만. 그 속에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자신이 낳은 딸 펄이 죽고, 송화가 낳은 딸을 자신의 딸 펄로 키운 버들. 남편 대신 바라보며 키운 첫아들 정호. 아직 버들의 나이 40대. 이민 2세대 펄과 정호가 성장하면서 가족들은 또다른 파도를 맞는다. 하지만 홍주와 버들은 더욱 용감하게 그 파도를 맞는다. 이다지도 용감한 주인공들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그저 삶을 용감하게 개척했다 정도의 표현은 너무 간단하다. 느낌이 전혀 오지 않는다. 무엇 이상의 찬양을 받아야 마땅할지 적절한 단어를 찾기 어렵다.

 


엄마가 쉬엄쉬엄 말했다. 편안하고 환한 얼굴이었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가난해서 팔여 오거나 일본 없는 세상에서 편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처럼 꿈을 찾아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록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사람이 내 엄마인 게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연적으로 남은 두 사람이 따라 떠올랐다. 로즈 이모가 내 곁에 있어 줘서 행복했다. 그리고 송화가 날 낳아 줘서 고마웠다. 레이의 끝과 끝처럼 세 명의 엄마와 나는 이어져 있다. 나는 또 어느 곳에 있든 하와이, 그리고 조선과도 이어져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제나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물 안 주길 잘했구로."

엄마가 웃었다. 우리는 비를 피하지 않았다. 하와이에 산다면 이런 비쯤 아무렇지 않게 맞아야 한다.

아스라이 펼쳐진 바다에서 파도가 달려오고 있었다. 해안에 부딪힌 파도는 사정없이 부서졌다. 파도는 그럴 걸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파도처럼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살아갈 것이다. 할 수 있다. 내겐 언제나 반겨 줄 레이의 집과 나의 엄마들이 있으니까.(마지막 면, 23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