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이나가키 에미코, 박정임 역(2022).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RHK.
2023-5
<피아노>란 키워드로 인공지능이 알라딘을 통해 눈앞에 데리다준 선물.
<피아노 치는 할머니가 될래> 글자 그대로 되고 싶었기에 <작은 연주회> 다음날 주문
1/18 읽기 시작 1/23 읽기 완료
D. 바렌하임의 피아노 소타나 30번을 듣는다. 아침 해가 저 멀리 부지런히 오고 있는 듯 하늘이 조금씩 희부여지고 있다. 3악장의 힘찬 전진이 이웃집 할아버지 같은 그의 손가락을 통해 달려온다. 이제 곧 도착이다. 그곳에는 평화와 안식이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건-슬프건 고통스럽건 환희에 찬 기쁨이 있었건-종착지에는 온몸의 힘을 뺀 마지막 한 번의 터치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피아노 소나타에는 인생이 담겨있다.
피아노는 친구이다. 모든 악기가 그렇듯. 늙어가는 나에게 항상 자리를 뜨지않고 한자리에 존재하는 듬직한 친구, 언제나 기다려주는 친구, 가끔은 뼈아프게 약점을 알려주는 진정한 친구이다. 피아노라는 친구를 곁에 두고 있어 나는 언제나 외롭지 않다. 같은 공감을 해준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에게 박수를.
표지의 그림이 인상적. 원래의 제목은 <老後とピアノ> 이나가키의 에미코의 작품은 읽어본 적 없음. 몸에 짝 달라붙고 어깨부터 등 아래로 움푹 파인 빨간 셔츠를 입은 그녀가 자신감을 넘어 요란해 보였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읽기 초반에 조카가 물었다. 재미있냐고? 딱 잘라 말했다. 재미없다고. 재미없어도 끝까지 읽는다고.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기에.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초반에 이런 생각을 했다. 시건방진 작가가 쓸데없이 오지랖은 넓고, 기만 센 50대 아줌마(?! 여성)의 나는 하고야 말 거라는 오버 넘치는 자랑질같이 느꼈다. 종종 피아노 연습을 위한 tip에 홀려 동행하기는 했지만.
하지만 역시 끝까지 가봐야 하는게 독서이고 인생이다. 이 아줌마 좀 멋지다. 나는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착 달라붙는 옷도 용기 있게 입고, 아포리 아줌마라는 살짝 저급스런 표현도 전혀 상관없이 폭탄머리를 하고, 자기 피아노가 없다는 이유라지만 공공장소(?) 카페 피아노로 하루 2시간 이상 연습한다는 고집스런 끈기도 아주 멋지다. 연주곡 리스트도 맘에 든다(완전 내 맘대로). 彼女はあたしに囁いている。ピアノを友たちにしてやってしましょ。一緒にね。(내게 피아노를 친구 삼아 함께 잘 살아봅시다라고 말을 거는 듯하다. 일본 작가라 그저 오랜만에 일본어로 써봄. 이것도 잘난 척. 그럼 누군가는 짱나할지도. 아니 사실 읽기 종반부에 일본어 원본을 읽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녀의 도전곡 리스트가 나의 도전을 자극한다. 하지만 이럴 땐 자중해야 한다. 피아노는 능숙하게 치는 게 목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차피 피아니스트가 될 것도 아니면서 잘 치려 들면 힘만 들어 오히려 치기 싫어진다. 즐기면 된다. 남이 듣는 피아노도 아닌데 뭐. 내가 듣기에 좋으면 그만이지 뭐. 잘 외워지지 않아 악보 없이는 남 앞에서 칠 수도 없는데 뭐. 달팽이의 여행처럼 느리지만 그저 천천히 시작해 볼밖에. 여전히 그녀도 피아노를 치고 있다. 나도 피아노를 친다. 함께 가봅시다. 싶어졌다. 내멋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