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우연들
김초엽 (2022), 책과 우연들, 열림원.
2023-11
김초엽은 과학도이다. 문학소녀는 아니다. 과학을 탐구하던 소녀지만 글쓰기를 좋아했다. 오래 글을 쓰다가 SF작가로 데뷔했다. 그녀의 작품은 SF를 좋아하지 않는 나 같은 어설픈 독서가에게도 끌리는 요소가 있었다. 그녀의 글에는 그녀 나름의 독창성이 있었다. 이름을 기억해 두었다.
작년에 신착도서 코너에서 빌려와 오래 집에 묵혀두었다. 책을 빌려두고 읽지 않는 것은 계속 다른 읽을거리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이제 곧 반납 시간이다. 시간이 부족하면 집중력이 높아진다. 빠른 속도로 읽는다.
쓰는 사람에게 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녀의 독서 행보가 나의 그것과 아주 살짝 닮아있었다. 일단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 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 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베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42쪽)'
논문을 쓰거나 보고서를 쓸 때, 수지에서 숙제로 받은 글을 쓸 때도 언제나 쉽지 않았다. 이제야 쓰겠다 싶은 순간은 쉽게 오지 않았다. 쓴다는 일은 쉽게 걸어지지 않는 길이다. 그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뭔가. 읽는 일이다. 읽기에는 정석이란 전혀 없다. 그렇게 읽다 보면 써지는 순간이 온다. 쓰다 막힐 때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꼬이거나 멍해질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럴 때 나는 읽는다. 지금은 전혀 쓰지 않는다. 무작정 읽고 있다. 정말 무작정 읽고 있다. 이렇게 무작정 읽다보면 언제가 제대로 쓰고 싶은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결코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책들의 매력을 발견하는 순간이 있다. 심지어는 그런 책들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있다. 나는 그것이 쓰는 사람으로서 독서가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순수하지 않은 동기로 시작한 일이 때로는 가장 멀리 나를 데려간다. 미심쩍은 기분으로 집어 든 책이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읽기가 '일'이 아니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세계다.(188쪽).
도서관에 가면 그런 생각이 든다. 책들 속에 누군가의 영혼이 담겨 있다고. 모든 영혼을 사랑할 수 없겠지만 만나야 하는 영혼은 꼭 만날 것이라고.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며 그저 서가 사이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책이 있다. 전혀 예기치 않던 순간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책을 만나는 경우이다. 우연한 책과의 만남은 아주 조금씩 나의 세상을 확장시켜 준다. 읽기란 이런 것이다.
'한동안 나에게 서평 또는 리뷰 읽기란 떠나고 싶지 않은, 오래 기억하고 싶은 세계를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거기서 천천히 멀어져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계속 이 안에 머물 수는 없더라도 언제든 이 기억을 돌려 볼 수 있게 정제하는 독후활동이라고 할까.(197쪽)'
'작가의 손을 떠난 한 권의 책은 수천수만 명의 독자를 만나며 수천수만 권의 서로 다른 내면의 책이 된다. 이 내면의 책들은 개인마다 너무나 다르고 다르게 구성되고 각자의 독서 경험에 고유한 방식으로 개입하므로, 다른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의 내밀한 해석과 감상을 서평으로 옮겨보려 해도 그것은 내면의 책의 일부일 뿐이고, 서평을 읽고 쓰는 행위 역시 또 다른 '내면의 서평'을 만들어내는 일이니까.
작가가 독자에게 온전한 의미를 전달하는 일에 실패하고 독자가 작가의 온전한 의도를 파악하는 실패함으로써 책은 원래 의도보다 더 확장된 존재가 된다.(219쪽)
수지에서 글공부를 할 때 가장 무섭던 시간이 합평시간이었다. 내가 쓴 글을 읽은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이 왜 그렇게 두려웠던지. 글쓴이의 손을 떠난 글을 이미 글쓴이의 것이 아니었음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평가가 모질면 기가 죽었다. 평가가 좋으면 몸에 힘이 들어갔다. 힘이 들어가건 기가 죽건 용감하게 글을 쓰는 일은 하지 못했다. 작가들에게 비평이나 리뷰가 그런 것일까.
저자가 그러했듯 나도 이 책을 통해 읽어야 할 새로운 책들을 만났다. 정리해 둔다. 한 권씩 한권씩 손에 두고 읽고 싶다.
칼 세이건 (2022).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이상헌 역, 김영사.
마리아 포포바 (2020), 진리의 발견, 지여울 옮김, 다른.
질 클레멘츠 (2018). 작가의 책상, 박현찬 역, 위즈덤하우스.
엘리자베스 문 (2021). 어둠의 속도, 정소연 역, 푸른숲.
대니얼 키스 (2017), 앨저넌에게 꽃을, 구자언 역, 황금부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