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eum 2024. 10. 22. 14:44

권여선(2023). 각각의 계절, 문학동네.

 

10/8~10/21

 

2024-55

 

책을 읽으며 독서노트에 메모하고 차를 마시는 일은 복잡한 일인가 보다. 자꾸 책을 읽다 찻잔을 건드린다. 찻물이 쏟아지고 독서노트가 얼룩지고 너덜거린다. 얼룩지고 너덜거리는 독서노트는 지저분하지만 나는 여전히 소중하다. 내가 써놓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가득하다.  

 

7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읽기에 부대끼지 않는 문장들이다. 살면서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기고 때론 그것들이 잊히지 못하고 되살아나 괴롭기도 하다 인생을 후회하게 만들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일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한 감성으로 되짚어보고 사연과 얘기를 만들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청춘의 말들, 엄마의 말, 오빠와 동생의 마음, 딸의 애증 등등

 

짧은 한편씩 천천히 읽는 동안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들려와 흥분했다. 내 생전에 이런 일도 가능하다니. 세상이 많이 진보하고 있음을 절감한다. 유튜브를 통해 여기저기 한강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말을 아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책과 문장이 많더라도 쉽게 생각하지 말고 책을 양으로 읽지 말고 읽는 동안 작가의 말에 충분히 귀 기울이고 소중히 문장들을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새로이 해보았다.

 


나는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청춘의 한 시절을 자꾸 되돌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무려 삼십년도 넘은, 거의 사십 년이 되어가는 머나먼 과거의 일들이다. 반복해서 돌이키다 보니 처음에는 안개에 덮인 듯 아득했던 기억이 조금씩 또렷해지는 듯했고 점점이 끊겼던 사건의 순서가 느슨하게 연결되기도 했다. 잘못 기억했던 부분이 바로 잡히거나 까맣게 잊고 있던 에피소드가 불쑥 떠오르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반추하면 할수록 내게 가장 놀라웠던 건 그 시절의 내가 아닌 듯 무섭고 가엾고 낯설게 여겨진다는 사실이었다.(중략) 내가 손쓸 수 없는 까마득한 시공에서 기이할 정도로 새파랗게 젊은 내가 지금의 나로서는 결코 원한 적 없는 방식으로, 원하기는커녕 가장 두려워해 마지않는 방식으로 살았다는 사실이, 내게는 부인할 수도 없지만 믿을 수도 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9203~204, 기억의 왈츠)

 

→ 소름 돗는 문장이었다. 내가 나를 나도 모르게 지키기 위해 걸러진 기억. 죽은 듯이 내려앉아 있을 내 가슴과 머릿송의 지하 바닥. 무엇이 있을지 어떤 내가 있을지 두렵다. 솔직히 나도 잊고 싶은 시간이 있다. 지금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내가 나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그 시간.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금의 내가 말한다며 다시 한번 더 따져 물어야 한다. 정말 니 죄를 네가 모르느냐고. 마지막 소설을 읽으며 가슴이 지하 이천미터쯤 내려가서 올라오지 않는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 하늘 높이 나를 수 있는 힘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