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멜로디
조해진(2024). 빛과 멜로디, 문학동네.
2025년 열 번째 책
국내소설 세 번째
1/23~1/25
빌려두고 사둔 책들이 한편에 잔뜩 쌓여있다. 그것도 두꺼운-일명, 벽돌책- 것들로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을 것들은 자꾸 늘어가고, 읽고 싶은 책들은 자꾸 발견된다. 도서관의 사서님이 그랬다. 도서관 다독자인 내가 신청한 책들은 빨리 구입해주고 싶다고. 그래서일까. 희망도서 신청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도착했다고 했다. 통통 튀어 오르는 탱탱볼 같은 그녀의 밝은 음성으로 대여해 두었다고 알려주었다. 여러 권의 책 속에 희망도서를 건네주면서 그녀는 내가 반납해 주면 자신도 읽고 싶어 기다린다고 했다. 그래서 먼저 대출한 책에 새해의 먼지가 쌓이는 것을 무시하고 먼저 읽는다.
내가 책을 사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낙서의 욕구 때문이다. 읽다가 줄을 긋고 싶고, 기록을 남기고 싶어지면 독서가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도서관의 책은 마음껏 낙서를 할 수 없다. 근질근질하다. 그래서 소심하게 연필로 표시하기도 하고- 반납할 땐 늘 지우개로 일일이 지운다- 오른쪽 상단 모서리를 살짝 접어두기고 하고, 포스트잇이나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두기도 한다. 도저히 아니다 싶으면 읽는 도중에 책을 주문하고 만다. <빛과 멜로디>도 그런 징조가 보인다. 이제 55쪽 밖에는 읽지 않았는데 2022년 11월 25일 첫날의 기록에서부터 자꾸 근질근질하다. 끝까지 도서관의 대출도서로 남을지 아니면 내 방에 남겨 조카에게 물려줄 목록 속으로 들어갈지 결정될 것 같다. 먼저 55쪽의 문장을 기록해 둔다.
살마를 만난 뒤부터 그녀는 사람을 찍는 것이 쉽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사진이 옳은지에 대해, 가령 배고픈 사람이나 다친 사람에게, 혹은 가족이나 연인, 이웃이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들이미는 것이 과연 맞는지에 대해...... 각자의 공간과 시간에서 그 사진을 접하게 될 익명의 사람들이 사진 속 고통을 미술작품처럼 관람하는 것에 그치거나 총알과 포탄이 부재한 자신의 현실에 안도할 뿐이라면, 그런 사진이 과연 이 세상에 필요하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더 이상 판단할 수 없게 됐다. 사진 한 장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수했던 고생-분쟁 지역으로 가기 위해 지난한 절차를 밟으며 여러 번 비행기를 갈아타야 했던 것이나 예고 없이 수고와 전기가 끊기는 열악한 환경에서 잠을 설쳤던 것, 무엇보다 언제라도 치명적으로 다치거나 죽을 수 있다는 원초적인 공포를 이겨내려 애썼던 그 모든 지난 시간들이 결국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모래성 같은 자기 민족에 불과할 수 있다는 허무를 알게 해 준 피사체가 그녀에게는 살마였던 셈이다. 어쩌면 역사의 한가운데서 증언의 사진을 찍는 스스로에게 숭고함을 부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들여다보게 했던, 그 숭고함을 계속 갖고 싶고 누리고 싶어서 헌신하고 사랑하는 포즈만 취했던 지난 시간을 반추하게 했던, 나아가 그 욕망을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했기에 괴로움을 안기기도 했던 최초의 피사체라고 표현해야 맞는지도 모르겠다.(55~56쪽)
왜 자꾸 우니? 왜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우는 거니? 알 수 없다. 눈물이 나는 까닭을. 세상 편안하게 시간을 누리며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왜 자꾸 우니? 몰라. 나도 몰라. 일부러 울려고 소설을 읽는 건가 봐.
귀를 찌르지 않는 낮은 강도로 편안한 피아노소리를 들으며, 햇살 와랑와랑한 거실에서, 겨우내 함께하고 있는 초록의 작은 이파리와 따뜻한 빛깔의 전구 아래 책을 읽는다. 소설의 형식을 띤 언어가 좋다. 낱말도 문장도 낱말과 문장으로 촘촘히 엮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조곤 조곤 이야기를 듣다가 괜히 울고 있다.
거실과 주방, 두 개의 방과 다용도실로 구성된 살마-친구의 이름이지-의 집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천장에 나있는 창 덕분인지 답답하지는 않아. 나는 이 집에 놀러 올 때마다 천장의 창문을 올려다보곤 했어. 신기했으니까. 저 네모난 창문 크기의 하늘에도 태양과 낮달, 구름이 시시각각 입장했다가 퇴장한다는 것이. 비가 오는 오늘도 창문은 자꾸만 내 시선을 끌고 있어. 허공에서는 고유한 형태랄 게 없는 빗줄기가 창에 부딪히는 순간엔 제각각의 모양으로 번져 흐르는 광경이 내게는 역시나 신기해 보이거든. (80쪽)
이 문장이 울만한 문장인가요. '신기했으니까.'부터 울컥했다. 단락이 끝날 때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일단 기록해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북을 다시 켰다. 왜! 왜? 왜.
어제는 울었는데 오늘은 아프다. 아파도 울음은 나겠지만 오늘 아침은 아파서 힘들고 고통스럽다. 소설의 이야기 속에서 통증을 느끼면서 왜 읽고 있는지 모르겠다. 두껍지 않아 금세 읽을 수 있다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가본 적 없고, 지금까지 내 삶에는 뉴스 이외에 우크라이나나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연결된 것이 전혀 없었는데 왜? 조해진의 언어로 탄생한 나스차의 말에서, 알마 마이어의 말에서 이토록 통증을 느끼며 힘들어하면서 동트지 않은 새벽에 홀로 힘들어하고 있는지 참 이상하다.
나는 지금껏 승준처럼, 권은처럼, 애나처럼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린 적이 있는가? 사람을 살게 하는 행위나 말을 한 적은 있었던가?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빛을 주고자 하는 마음을 먹은 적이 있었던가? 되짚어보면 나하나 추스리기에도 버겁다는 핑계로 나만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냉정하고, 생각하고 살아왔을 뿐 나의 말과 행위가 타인에게 희망을 주거나 삶의 이유가 되거나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때문일까? 어느 순간 읽기 힘들어졌다. 뭔가 먹어야할 것 같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 료사를 우크라이나에 두고, 오로지 아기의 출생을 위해 국경을 넘을 예정이라는 말을 옥사나 할머니에게 힘들게 전하는 나스차의 시간에 지구 반대편의 나는 힘들어 따뜻한 것이라도 먹어야겠다는 속 편한 생각을 하고 있을 뿐. 그리고 이런 생각을 행동으로 바꾸는 것에는 아무 제약도 없는 일상적 공간에서 고통은 철없어 보이는 나의 생각의 목과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2025년 1월 25일, 새벽)
너무 많이 울었다. 말이 누군가에게 (생명을 살리는) 주문이 되는 순간, "다치지마. 다시는, 절대......" 라는 문장에서 비로소 안심했다. 그래 맞다. 콜린의 절규처럼 사람을 죽이려고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아프리카에서, 시리아나 이라크에서 가자지구에서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전쟁이 이어지고 있다. 한강 작가는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번거로운 행사를 하는 것조차 할 짓이 아님은 지적했다. 맞는 말이다. 전쟁 속에 태어난 아기들이 보는 세상이 전쟁이 전부라면, 날마다 깨지고 부서지고 죽어가는 것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성장하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것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나는 지금껏 사진에 감동하거나 깊이 다가간 적이 없다. 그러나 권은이나 게리앤더슨과 같은 사진가들은 삶을 살리는 사진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버리고 있음을 생각했다. 글이나 사진이나 시선을 끌기 위한 얄팍한 선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하고, 글이나 사진과 같은 예술적 행위는 죽음보다 생명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려 한다.
"태엽이 멈추면 빛과 멜로디가 사라지고 눈도 그치겠죠."
소설을 써준 작가에게 감사하고, 소설을 소개해준 문학동네의 편집자 K에게도 무한 감사한다. 언제나 좋은 책을 만들어주는 문학동네를 사랑한다. 너무 가까이 가고 싶지 않아 앞으로도 어설프게 나서진 않겠지만 언제나 내 자리에서 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언제나 문학동네의 발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