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2015), 직업인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아무 생각없이 그냥 빌렸다가
이러저러 미루어두었다
반납 독촉에 밀려 왕창 읽기 시작했다.
공감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정독한 책.
소설가가 될 것은 아니지만
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거나
배울 점이 많았던 책이다.
리뷰라고 하기 보다
줄을 칠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은 남겨본다.
소설가라는 인종은 수많은 결함이 눈에 띄기는 하지만, 누군가 자신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에 관해 대체로 대범하고 포용적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너무 머리가 좋은 사람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작업이다.
너무 머리 회전이 빠르 사람, 특출나게 지식이 풍부한 사람은 어렵다. 소설이란 상당히 저속의 기어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디.
걷는 것보다는 약간 빠르지만 자전거로 가는 것 보다고 느리다.
천재는 천재의 속도가 있고, 지식인에게는 지식의 속도가 있고, 학자에게는 학자의 속도가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속도는 대부분 긴 스팬을 두고 보면 소설 집필에는 적합하지 않다.
소설이라는 링에 올라도 결국 똑똑한 사람은 한두편 걸작을 남길 수는 있어도 소설가로 살아남기는 어렵다.
소설이란 이렇다.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기성관념을 버리고 느낀 것, 머리 속에 떠오는 것을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써보면
되지 않을까?
언어는 터프한 것이다. 긴 역사가 뒷받침하는 강한 힘을 가졌다. 누가 어떻게 어떤 식으로 거칠게 다루든 그 자율성이 손상되는 일은 없다.
언어가 가진 가능성을 생각하는 한 모든 방법으로 시험해보는 것은, 그 유효성의 폭을 가능한 넓혀가는 것은
모든 작가에게 주어진 고유의 권리이다. 그런 모험심없이 새로운 것은 탄생하지 않는다.
첫 소설을 쓰면서 느꼈던, 문장을 만드는 일의 '기분좋음' '즐거움'은 지금도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소설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퐁퐁 샘솟듯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오리지낼러티-독창성-는 바로 그러한 자유로운
마음가짐을 제약없는 기쁨을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생생한 그대로 전하고자 하는 자연스런 욕구와 충동이 몰고온
결과적인 형체에 다름 아니다.
본인이 아무리 잘 썼다 완벽하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는 좀더 좋아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퇴고단계에서는 자존심이나 자부심 따위는 최대한 내던저 버리거고
달아오른 머리를 적정하게 식히려고 노력한다.
단지 그 달아오른 머리를 지나치게 식혀버리면
퇴고 자체를 못 하게 되니까 조심해야 한다.
시간에 의해서 증명된다.
해야할 일은 똑부러지게 했다는 확실한 실감만 있으면 기본적으로 두려워 할 것이 없다.
다음은 시간의 손에 맞기면 된다.
시간을 소중하게, 신중하게, 예의 바르게 대하는 것은 곧시간을 내편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을 대할 떄와 똑같다.
소설가의 기본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의식의 하부에 스스로 내려가는 것이다.
마음속 어두운 밑마닥으로 하강한다는 것이다. 큼직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 수록 작가는 좀더 깊숙한 곳까지 내려가야 한다.
큼직한 빌딩을 지으려면 기초가 되는 지하 부분을 깊숙이 파내려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치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할수록 그 지하의 어둥음 더욱더 무겁고 두툼해진다.
책에 묘사된 온각 다양한 감정을 거의 나 자신이 것으러서 체험하고 상상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오고 가면서
온갖 신기한 풍경을 바라보고 온갖 언어를 내 몸속으로 통과시키는 것으로 내 시점은 얼마간 복합적인 것이 되었다.
즉 현재 내가 서있는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조금 떨어진 다른 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나 자신의 모습까지
나름대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가능해 진 것이다.
어떤일을 자신의 관점에서만 보면 아무래도 세계가 부글부글 끓어서 바짝 졸아든다.
온몸이 긴장하고 발걸음이 무거워져
자유롭게 움직이기 어렵다.
하지만 몇가지 시점에서 자신이 선 위치를 바라보게 되면 나자신이라는 존재를 뭔가
다른 체계에 맡길 수 있게 되면, 세게는 좀더 입체성과 유연성을 갖기 시작한다.
이건 인간이 이 세계를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