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슬아(2024). 최선의 삶, 문동.
2025-53
9/29~10/2
읽기 고통스럽다. 그저 좀 험난한 여중생의 잔혹사이길 바랐다. 웃음도 적절히 섞여 한숨 돌릴 여유도 있길 바랐다. 우리의 청춘도 돌이켜보면 거칠기 짝이 없으니까. 이미 어른이 된 내가 상상하기 어려운 말과 사건과 관계와 공간이 존재하니까. 그래서 잊고 마는 때니까. 어쩌면 그 시기는 그런 시기일지도 모르니까.
사는 동네에 따라 사람이 나뉘다. 전민동과 읍내동 아이들은 같은 전민중학교를 다니고 어울려 놀지만 노는 이유도 노는 방법도 다르다. 설국열차를 타고 무한궤도를 달리는 것처럼 산다. 누군가는 그게 당연하고 누군가는 억울하다. 또 누군가는 아닌 척 외면한다. 살아가기 위해 그렇게 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아이들은 일부로 상처를 만든다. 상처를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자신의 상처를 감추려고 남의 결핍을 이용한다. 친구라고 부르며 사기친다. 꿈을 가진 아이가 꿈인 아이가 어울려논다. 아이들의 꿈을 위해 존재한 어른이 하나도 없다. 세상의 어른은 다 어디로 가고, 아이들의 잔혹스러운 세계만 이다지 만연하게 존재하는 것일까.
아람은 아람처럼 살고 소영은 소영이 아닌 소영으로도 살 수 있는데... 강이는 왜 강이로 살지 못할까. 강이가 기댈 수 있는 희미한 빛은 어디에도 없다는 건가. 강이는 왜 그래야 하는가. 강이가 읍내동에 살기 때문에, 읍내동 애가 전민동 애를 친구로 불러야 하기 때문에. 아니면 그저 그런 날들을 위해, 대체 왜?
강이의 성장, 강이의 가출, 노출된 폭력과 위험. 우리들은 강에게 뭐라 말해야 할까. 강이는 무엇을 원할까. 그저 무심히 모른 척해주면 될까.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가야 할까.
작가에게 이유를 묻기 전에 얼른 고백하자. 내곁의 강이에게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래서 읽는 내내 답답했다. 누아르 영화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듯 개운치 않다. 임솔아 작가의 언어 세상이 변했으면 한다고 말하면 예가 아닐까.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어>, <최선의 삶> 모두 엄청 열심히 살고 있는 청년들이 엄청나게 잔인한 아픔에 노출되어 있어 그걸 읽는 내내 엄청 조바심치면서 안달복달했다는 말을 전한다. 그래서 읽는 동안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엄청 피곤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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