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나의 언어 41

이제 남은 것

언제 죽어도 여한은 크게 없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는 젊은 날을 뚫고 조금 번듯한 직업을 갖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나 자신만을 향해 치열하게 살았던 시간을 넘어서니 늙고 힘없는 부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에겐 제대로 하지 못한 딸이었지만 남은 엄마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그러고 나니 나도 나이가 들었다. 삶의 고비를 넘고, 나이의 마디를 넘어 이제 낼모레면 육십 대가 된다. 그러니 무슨 큰 미련이 있으랴. 굳이 욕심을 부린다면 좀더 건강한 시간을 갖고 싶다. 아직 건강한 시간 동안 경험하지 못한 스페인이나 영국 같은 새로운 문화 속에서 두근거리고 불안해하면서도 생생한 생활을 하고 싶다. 이런 욕심 외에는 크게 하고 싶은 것은 없다. 아니구나. 한가지 더. 책을 쓰고 싶다. 전공 서..

안쓰럽다!

지난 추석, 국민들의 밥상에 무슨 이야기를 올릴 것인가로 여야가 충돌했다. 낮아질 대로 낮아진 대통령 지지율 때문인지 여당과 대통령의 행보가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추석 연휴 전날 대통령은 명동성당 무료급식소에서 앞치마를 입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자신이 먹을 음식도 해본 적 없을 듯한 사람이 700인분의 엄청난 김치찌개를 직접 끓여 무료 배식을 했다. 두건을 쓰고 앞치마를 두르고 푸근한 아버지의 표정을 짓는 사진을 보며 괜히 마음이 시렸다. 취임하고 몇 달 되지 않는 시점, 단임제 대통령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력이 최고 정점을 찍어도 모자랄 시간에 낮아진 지지율 때문에(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음식을 만들고 배식을 하고 있는 대통령이 안쓰러웠다. 나의 오지랖인가. 저녁에는 TV 화면에 대통령 부부가 나와..

태풍 '힌남노'

2022년 9월 1일. 며칠 전부터 계속 태풍 '힌남노' 얘기가 언론을 통해 들려온다. 금방이라도 엄청난 태풍이 밀어닥치니 모두 조심하라고. 1일 밤 제주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기로 했던 조카마저도 친구 가족들의 걱정으로 수수료 22,000원(너무 크다.)을 물고 오후 2시 비행기로 돌아왔다. 원래 자신이 타아할 제주발 마지막 티웨이 항공기가 캄캄해진 동변동 하늘 위로 모습을 보이자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억울한 듯 속상해했다.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하는 예상 일자는 9월 6일 새벽. 방송사마다 미리부터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어대니 평범한 시민들의 생활에 살짝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보도하는 언론의 의도는 예방이고 조심하라는 것인지 모를 바 아니지만 그 소식에 영향을 받아 스케쥴이 바뀌는 시민들만 어리석은..

우리들의 블루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디어 마이 프렌즈'로 나를 울렸던 '노희경' 작가가 새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로 또 나를 울린다. '한수와 은희' 중년의 우정 그리고 사랑. 어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길들이고 어루만지며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영혼의 체력'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다고 정여울은 말했다. 살아보면 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에 '갈망(결핍)'이 가득한 한수. 때문인가 한수는 골프가 가장 좋다는 딸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어 무리한다. 은행 지점장이라는 그럴듯한 지위를 가졌지만 실속은 하나도 없이 매일이 힘든 기러기 아빠. 한수의 힘겨운 표정이 그걸 말해준다. 세상 어느 하나 뜻대로 안 되었던 은희. 지지리도 가난해서 ..

2016년의 기록

글쓰기는 창조가 아니라 모방이다. 완전히 새로운 모방. 10대는 해맑음 20대는 혼돈 30대는 막무가내 정열 40대는 찬란 속에 슬픔 50대는 무엇일까? 그리고 나머지는 과연 어떨지...... 오랫동안 같은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다 보면 수많은 사연이 맺히고 맺힌다. 오늘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전설처럼 영근 은행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한꺼번에 수많은 얘기가 허공에 흩어진다. 잠시 후 도착할 낯선 간이역에도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제 모습만큼의 표정을 지닌 사람들이 타고 내릴 것이다. 겨울 아침, 움직임을 거부하는 이른 시간. 어제의 피곤이 질질 끌리듯 따라온다. 흐릿한 사각 창 너머 어지러운 바람의 물살의 의지와 관계없이 날아다닌다. 지금 가슴이 울리는 것은 귀로 들리는 음률이 내 조각난 심..

쇼핑의 이유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고모, 혹시 백화점 갈 일 없어?" "없는데." "백화점 가본 지 오래야. 갈 일이 크게 없네." 눈치도 코치도 없는 고모의 대답이었다. 조카도 쉽게 꺼낸 말이 아닐 텐데 말이다. 조심스럽게 걸어온 말의 숨은 의도를 전혀 읽지 못했다. 조카는 서울에서 하는 미대 졸업반 친구의 작품 전시회에 초대를 받았다. 코로나 시국이어서 인당 초청 가능한 사람 수가 제한되어 있는데 자기를 초대해 주었다고 기뻐했다. 친구에게 축하해 주고픈 마음과 서울에 가고 싶은 욕망이 은근하게 결합하여 간만의 서울행에 다소 들떠있었다. 지난겨울, 졸업 유예를 하고 집으로 내려온 조카는 취업 준비를 위해 서울로 되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러나 서울 지역의 코로나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 조금씩 망설이는 사이 그저 시..

과꽃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아름다운 가사로 시작하는 동요가 있다. 출근길 자동차 안,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원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생각이 잊고 지냈던 오래전으로 되돌아갔다. 거기엔 엄마가 나와 함께 있었다. 2011년 치매 진단을 받은 엄마는 2년 뒤 쓰러져 고관절 골절로 입원을 했다. 무던히 애를 썼지만 스스로 관리가 안되던 엄마의 입원은 계속 길어지고 있었다. 그날 나는 휠체어에 앉는 것이 가능해진 엄마를 모시고 병원 옥상 정원으로 늦은 봄날의 햇살을 맞으러 갔었다. 옥상 정원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고, 작은 싹들이 한창 피어나고 있었다. 식물에 문외한이었던 내가 아는 것은 고작 채송화 정도. 장애 아..

일년 전 내게서 온 편지

일 년 전 나에게서 엽서가 왔다. 올 때가 되었다 싶었는데 왔다. 지난해, 10월 24일 나는 동료와 함께 올레 7코스를 걷고 있었다. 서귀포 올레 여행자센터를 출발해 월평마을까지 걷는 코스이다. 날씨도 적당했고, 몸 상태도 좋았다. 돔베낭 길을 걷다 바당 길이 막혀 서귀포여고 앞 도로까지 나와 걷다 다시 바다로 내려갔다. 그 길을 따라 걷다 '속골'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 오늘 내가 받은 엽서를 보내준 우체통이 있다. 친구와 함께 각자 일년 후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 시간을 거슬러 느리게 도착하는 편지. 일 년이 지난 뒤 같은 시간대에 나는 과연 잘 살고 있을지 걱정하면서, 부디 잘 살고 있기를 소망하며 두서없는 글을 썼었다. 그것이 일 년이 지나 내게로 날아왔다. 난 '지금'이 소중해요. '지금..

시월의 멋진 날

날이 찼다. 시월의 중심에서 더위와 추위가 마주치고 있었다. 산바람이 차서 걷는 방향을 거꾸로 틀었다. 생각보다 날이 찼다. 입은 옷이 얇았다. 왠지 아침부터 맞바람에 걷고 싶지 않았다. 바람보다는 햇살이 고팠다. 채 지지 못한 둥근달이 투명하게 서쪽 하늘에 떠 있었다. 달 아래 부지런한 자동차가 조용히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동편에는 산과 하늘의 경계를 따라 붉은 빛깔이 드넓게 피어나고 있었다.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미 뜨거운 해가 올라오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과 태어나는 것, 물러가는 것과 몰려오는 것의 빛이 너무 달라 몰래 놀랐다. 내려앉을 달에게 작별을 고하고, 떠오르는 해를 향해 걸었다. 몸이 빨리 따뜻해질 것 같았다. 떠오르는 붉은 해의 기운이 몸을 뚫고 들어와 잠든 눈이 밝아..

제주 올레 DDG, 내게 쓰는 편지

COVID-19로 온 세상이 어수선하던 작년, 제주 올레를 만든 서명숙 이사장은 올레 블로그에 라는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올레의 모습, 그 스펙트럼이 다채롭듯이 올레를 걷는 사람들의 사연이나 이유도 저마다 달라 본인이 만난 올레꾼들의 이야기를 편지로 썼던 것 같다. 보내는 사람은 서명숙, 수신자는 제주 올레를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이다. 첫 번째 편지가 작년 8월 3일에 발송한 것인데 벌써 열여섯 번째라고 하니 참으로 사연이 많구나 싶다. 열여섯 번째의 편지에는 내가 살짝 등장한다. 때문일까. 편지글을 반복해 읽다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내게 붙이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프롤로그 '제주 올레'를 처음 걸었던 것은 2011년 겨울이었다. 교직원 연수가 제주에서 있었고, 올레 7코스를 걷는 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