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지성 8

62. 보다 SEE 見

김영하(2014). 보다 see 見, 문학동네. 2019년 코로나 19 이전의 세상에서 소설가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를 읽었다. 소설가가 쓰는 '수필'은 머쓱하고, 가드를 내리고 상대를 맞는 권투선수 같은 기분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 아닌 그의 산문은 무척 재밌고 읽는 동안 행복했다. 가끔은 소설이 아닌 문법으로 글을 계속 써주길 바란다. 세상을 제대로 보는 방법은 '본' 것을 쓰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볼' 것이 지나치게 넘치는 세상에서 더 이상 '본다'는 행위가 이성적이지 않으며 그저 흘러가는 물결 같다고 했다. 제대로 보기 위해 '생각해'야하며, 생각하기 위해 써야 한다고 했다. 소설가인 그가 '본'것을 생각하고 쓴 글이 독자인 나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하고 졸필이지만 ..

숙제

언제부턴가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거울 속에 내가 아닌 투미한 다른 이가 있다. 내가 분명한데 내가 아니다. 출근 준비를 위해 씻고, 거울을 본다. 아직 물기가 남은 피부 이건만 촉촉하다는 느낌이 적다. 지난밤 눌린 베개 자국은 회복이 더뎌서인지 그대로 남아 있고, 어제의 피로도 멍한 눈동자로 남아있다. 눈 아래가 내려앉고, 입가엔 나이선이 진하다. 입술은 바삭거리고 붉은 빛깔은 흔적도 없다. 어휴! 감추기 위한 화장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엇인가 바르지 않을 도리는 없다. 나름대로 열심히 발라본다. 칙칙하던 피부색이 아주 조금 밝아졌다. 눈썹털이 적은 것은 유전자의 탓이다. 피부색이 맑은 나이에는 눈썹털이 적은 것도 그저 봐줄 만하더니 이제는 제대로 그려 넣지 않으면 아파 ..

번데기

번데기 삶는 냄새는 구수하다. 실제 그 맛도 고소하다. 번데기를 삶을 때 나는 향기는 어린 날의 아련한 추억이다. 어릴 적 부모님은 자주 우리들을 데리고 수성못이나 동촌 유원지를 다니셨다. 특히 엄마는 야근을 마친 아버지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시장을 갔고, 극장을 갔다. 방천시장을 다녀오는 길에도 늘 극장을 거쳐 집으로 갔다. 수성 극장 앞에는 언제나 군것질거리를 파는 수레가 있었고, 그곳에는 언제나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모락모락 김이 오르던 번데기 양푼이 있었다. 때로 영화를 보기도 했던 수성극장 앞에서는 낡은 신문지를 원추형으로 좁게 접은 종이 고깔에 번데기를 담아주었다. 번데기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간식이었다. 번데기를 먹는 것이 좋았을까. 아님 엄마를 따라다니는 것이 좋았을까..

개꿈 이야기

꿈을 꾸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적어두어야 한다. 지금 생각해도 웃기고, 황당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꿈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듯 같아 금방 잊힐 것 같지 않다. 꿈속에서는 여전히 건강한 엄마가 계셨다. 엄마는 얼핏 밋밋하지만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엄마와 사는 나는 행복해 보였다. 역시 좋았다. 우리 집이었다. ‘수필과 지성’을 지키는 든든한 어른인 장호병 교수님이 느닷없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 마치 저녁을 먹고 마실 삼아 마을 카페에 차를 마시러 온 듯 가벼운 표정이었다. 언제나 나의 꿈이 그렇듯 시작도 황당하고, 사건의 연결도 비약적이다. 연결고리 전혀 없는 사람들과의 사건이 묘하게 자연스럽게 연결되곤 한다. 나는 분명 내 아파트에 있는데 거긴 카페이기도 했다. 교수님께서 커피를 한잔 ..

수필(피천득)

수필금아 피천득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 빛이거나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