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나의 언어

어제인 듯

Jeeum 2019. 3. 27. 09:18

 

어제인 듯


 

출장이 잡혀있는 금요일 아침 수필과 지성으로부터 이번 주 글제가 어제인 듯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출장 내내 생각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겨우 첫사랑의 기억이라는 것이 매우 당황스럽다. 생생한 어린 날의 기억임에 분명하지만 어떻게 써내려가야 할지 몰라 계속 망설이고 있다. ! 역시 사랑은 하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표현하는 것도 어려운 것이구나!

  

  

통영에서의 일을 마치고 동피랑 마을에 잠시 들렀다. 토요일 오후인 탓일까. 매우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잠시 가장 높은 동포루에 올라 먼데 바다를 바라본다. 대학시절 이곳은 충무였다. 저기 충무항에서 배를 타고 비진도라는 섬으로 여행을 갔었다. 그것이 처음 한 외박이기도 했다. 물론 둘이 아니라 동아리 전체의 합숙이었다. 따뜻하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봄기운을 받은 바다가 반짝인다. 시간의 옆구리 속에 감추어두었던 이름 하나가 바다만큼 푸른 하늘 어딘가 떠있는 듯하다.


 

나의 첫사랑은 대학 동아리 선배였다, 대학생이 되었어도 천생 범생이었던 친구랑 나는 서투른 대학생활에 날마다 들뜨기만 했다. 동아리(당시는 서클이라 불렀다) 선택도 마찬가지로 무지했다. 며칠을 서성이며 고르다 어처구니없이 선택한 것이 하필 테니스반이었다.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운동에는 전혀 무관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동아리에서 4학년 공대생이던 그를 만났다. 만났다기보다 그냥 보았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여럿이 어울려 술도 마시고, 다방에 앉아 노닥거리기도 하고, 선배의 하숙집에 떼를 지어 쳐들어가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어느 날 기타를 치던 그가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선배는 후배의 밥이어서 친구들과 일부러 공대식당으로 가서 밥을 얻어먹은 것이 몇 번인데 갑자기 설레기 시작한 것이다. 짝사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설렘은 선배의 늦은 군 입대로 끝이 났다. 그렇게 설렘만 주고 어느 날 선배는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이십년이 흘렀다. 꽃이 지고 연푸른 이파리가 넘실되던 사월의 어느 날, 작은 휴대폰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낚아채 듯 기억이 살아났다. 그 긴 시간이 무색하게 말 한마디로 한순간에 딱 한사람의 모습이 푸른 하늘에 떠올랐다. “선배다,” 우리가 처음 보았던 대학 캠퍼스에서 그렇게 느닷없이 다시 만났다. 기억과 기억사이 흘러간 세월만큼 달라진 모습이었지만 한때 그리워했던 그 사람이 거기 서 있었다. 반가움과 호기심 그리고 또 무엇이 있었을까? 첫사랑은 기억으로 끝나야지 만나면 안 된다고 하던데 왜 그럴까? 이렇게 좋은데. 이미 중년이 된 선배였지만 사랑했던 그 시절의 그는 여전했다. 더욱이 그는 잊고 지낸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내가 자신에게 보냈다는 여러 장의 엽서에는 어린 여자애의 수줍은 고백이 부끄럽게 적혀있었다, “그 시절 내가 그에게 그랬구나.” 간질간질 부끄럽고 숨고 싶었다. 그리고 나만의 짝사랑도 아니었음도 알려 주었다, 인사도 못하고 입대를 했으나 입대 전 내가 보낸 엽서가 젊은 자신의 지켜준 힘이었노라 해주었다. 그리움에 여러 번 찾았으나 이미 대학을 그만 둔 나를 찾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아주 오래 보고 싶었으며, 어렵게 찾아 연락이 닿은 것이라 설명했다. 할 말이 많아서였을까 못다 한 첫사랑의 기억이 아쉬워서였을까 이후로도 여러 번 가볍게 만나 식사도 했고 술도 마셨다. 새삼스런 많은 이야기들이 두서없는 대화 속에 오고갔다.

    

 

만남은 기억을 소환시키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간다. 선배와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억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잎새 지고,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던 날.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름다운 나의 사랑을 잘못된 만남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한 사람의 결정이었지만 이미 성숙한 또 한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다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십여 년 흘렀다. 선배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가끔 산책삼아 들리는 대학의 그 벤치에 홀로 앉아 자유롭게 그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선배의 존재는 알 수 없다. 다만 당시 선배의 전화번호는 나의 비밀번호 한 조각이 되어 있고, 그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 번호는 나의 휴대폰 번호로 남아있다. (2019.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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