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나의 언어

허수아비

Jeeum 2019. 3. 19. 09:14

허수아비

 


  

농촌진흥청 앞으로 넓은 들판이 길게 뻗어 있었다. 할머니 댁을 나와 오른쪽으로 낮은 산길을 넘어서면 그냥 들판이었다. 드넓은 들 한편에 조부모의 논도 있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 들판에 수수한 차림의 키만 큰 못생긴 허수아비가 등장했다. 생긴 모습과는 달리 그들이 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여름내 농부들의 수고를 먹고 자란 낟알을 노리는 새떼들로부터 생명 같은 벼를 지키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너덜거리던 옷차림의 허수아비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벼를 베고 모두가 떠나버린 텅 빈 겨울이 되어도 한결같은 모습 그대로 들판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고향의 논밭처럼 슬며시 허수아비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가끔 들리는 청도에도 눈을 사로잡는 들판이 꽤 있다. 늦가을 차를 몰고 지나노라면 아침햇살이나 석양이 비치는 들판을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차를 세우고 두근거리는 노란빛의 들판을 휴대폰 카메라로 기어코 찍어야 지나쳐올 수 있다. 하지만 그 곳에서 허수아비를 본 기억은 없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존재란 없었던 것처럼 허수아비의 흔적은 아예 없다. 청도에는 새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허수아비가 하던 일을 대신 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것일까?

     

 

세월이 가면 사람도 변하고 산천도 변한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사람 사는 세상에는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위험은 항상 존재했다. 위험으로부터 개인의 삶을 지키는 것은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며, 사회의 역할이기도 하다. 최근 매스컴은 일부 연예인의 몰지각한 행위에 대한 보도로 가득하다. 너무 기가 막히고 불안하여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 그들이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그런 일을 하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인지,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걱정스럽다. 이미 스마트폰이 없으면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전화기가 대중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다들 한두 개의 단체 대화방에 참여하고, 그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음담패설이나 야한 동영상 한두 번쯤 공유하고 희롱했던 경험이 어찌 없다고 할 수 있을까. 혹시 그들도 가벼운 기분으로 시작하여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길로 가버린 것은 아닌지 안타깝다, 어쩌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는지 답답하다. 누가 그런 길로 가는 젊은이들을 지켜 줄 수 있는 것일까?

    

 

요즘 같이 어지럽게 얽혀있는 세상에서 한 개인이 도덕적으로 양심적으로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세상이 살만한 것은 실제 세상이 좋아서라기보다 스스로 양심과 도덕을 지키려고 노력하거나 애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지키기 힘들면 부모나 가족 그리고 친구, 선배, 후배, 동료들이 지켜주고 바람막이가 되어 주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고 여전히 세상이 아름답고 평화가 넘치게 된다. 우리의 삶이 바람찬 들판이라면 이들이 우리에게 있어 묵묵히 삶을 지켜주는 허수아비인 셈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조용히 묵묵히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지켜온 허수아비가 새삼 대단하게 생각되는 것은 세상이 너무 소란스럽기 때문인가 보다. 지금이 바로 우리 모두가 말없는 허수아비가 되어야 할 때인가 보다. (201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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