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는 움직이는 물체의 제동장치이다. 달리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는 잘 달리는 것만큼 잘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사람의 삶이 신나게 잘 달릴 때도 가끔 제동장치가 필요하다. 언제나 잘 나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 만큼 타이밍 좋게 잘 멈추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지혜의 범주에 속한다.
나는 나름 호되게 철이 들고, 어른이 되었다. 대학 1학년 나이에 부친의 큰 사업 실패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좌절해야했다. 부모님의 보살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랐기에 하고 싶은 사소한 것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무척 방황했다. 오랜 방황 끝에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 목표가 되었다. 그때부터 스스로 서기 위해 오로지 나만을 챙겼다. 공부도 일도 직장도 스스로 찾고 선택했다. 아무 것도 없는 바닥에서 한 사람이 독립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도 공부도 열심히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자신이 못해 주는 죄로 요구도 욕심도 내보이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 할 때 대학을 다시 가겠다고 했을 때도, 교사를 포기하고 대학원을 가겠다고 할 때도, 늦은 나이에 유학을 가겠다고 할 때도 엄마는 딸이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이렇게 나는 내 자신만을 챙기며 살았다. 덕분에 나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어느 정도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빠도 남동생도 있었기에 엄마와 한 집에 살아도 항상 내 하고픈 대로 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달라진 엄마는 역시 병이 들어 있었다. 그것이 2011년의 일이다. 인정하기 어려웠다. 경험자는 누구나 알겠지만 자신의 부모가 치매라는 것은 참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다. ‘특수교육’을 전공해서 현장에서 무수히 많은 장애아동 부모를 만나 부모가 자녀의 장애를 잘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힘든 날이었다. 책 속에 엄마의 증상이 나열되어 있었다. 치매 엄마는 오랫동안 하고픈 대로 밖으로만 돌던 나를 멈추어 다시 엄마 곁으로 불러들였다.
시간이 흐르고, 엄마의 병이 진행되었다. 진단을 받을 즈음에는 혼자서 생활도 가능했다. 오랫동안 살던 집에서 늘 해오던 습관적인 일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좋아하는 강아지를 보살피는 일도 가능했다. 하지만 걷다 넘어져 고관절이 파손되고, 자다 일어나다 갈비뼈가 나가고 이유도 모른 채 다리에 금이 갔다. 점차 스스로 거동하기 어려운 상태로 진행되면서 차츰 약해졌다. 노인 장기요양보험의 도움으로 집에서 생활하다 주간노인보호센터를 다니게 되었다. 이름만큼 미소가 가득한 센터 덕에 유치원을 다니는 아기처럼 생활했다. 그러나 겨울을 나기 힘들어 매해 힘겹게 보냈다. 여러 곳의 노인요양병원을 거쳤다. 오히려 나빠졌다. 말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지난 해 여름, 긴 병원생활을 마치고 엄마를 집으로 모셨다. 개인 간병인을 집으로 오시게 했다. 점차 건강을 회복해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비례하여 엄마는 아기가 되고 있다. 요즘 매일 엄마가 엄마를 찾으며 칭얼거린다. 가끔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다. 아기를 돌보듯 엄마랑 산다. 엄마를 보면 가까운 미래의 내가 보인다. 그래도 엄마를 만지고 부르고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다시 말도 하게 되었다. 조금씩 살이 오른다. 이 봄이 가기 전에 다시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하는 것이 목표이다.
자신감에 넘쳐 정신없이 달려오던 여자는 저랑 똑같이 생긴 엄마가 무거운 병이 들고서야 비로소 남은 인생을 생각하고 가족과 부모를 생각하게 되었다. 독립된 자신이 가장 중요했던 어린 날의 목표를 이루고도 여전히 자신밖에 모르고 밖으로만 돌던 철부지 성인이 집으로 돌아왔다. 밥하나 제 손으로 할 줄 모르면서 선생인 척 하는 여자를 스스로 밥을 하고, 집안일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픈 엄마가 아니었으면 여전히 나는 요리를 해서 나누는 행복도, 흙을 만지며 꽃을 가꾸는 재미도, 소소한 집안일의 즐거움도 모른 채 노인이 되었을 것이다. 누구나 아픈 노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그런 빈 깡통 같은 딸이 혼자 남게 되었을 때 굶어 죽지 말라고 세게 제동을 걸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은 음력 3월 3일, 엄마의 생신이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 부랴부랴 미역국을 끓이고 부드럽게 밥을 지어 말아드렸다. 죽에 밥을 약간 섞어 드시던 엄마는 생일 미역국에 말아드린 밥을 잘 드셨다. 그날따라 맑은 정신으로 말도 걸고, 대화도 많이 했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를 찾으며 울상이 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가끔 말한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엄마를 끌어안고 힘들지 않느냐고.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보내드리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그렇다. 우리 가족 모두 처음 겪는 일이어서 거듭하여 시행착오를 했고 힘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와 함께 하는 삶을 선택했다. 우리 형제가 효자효녀여서는 아니다. 엄마와 함께 지내기로 결정하면서 삼형제는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지금 꼭 알아야 하는 것들, 가령 노인이 되는 약간의 지혜와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어려서 엄마의 보살핌으로 우리가 어른이 되었듯 엄마의 힘든 노년기는 가족인 우리가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의 엄마들이 자식을 키우며 겪었을 시행착오나 어려움을 잊어서는 안 되며, 가혹한 시대에 젊은 여성이 포기했을 많은 것이 있었음을 같은 여성인 내가 잊지 않아야 함을 알려주었다. 나보다 우리가 소중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알츠하이머 내 엄마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자신의 딸을 멈추게 하여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2019년 4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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