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선 박진희 지음(2015).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 거야, 치유의 숲.
제주 책방 [소리소문]을 다녀왔다. 책방의 주인들을 만났다. 내가 보기에 아직 어리고 건강한 젊은 두 사람을 보았다.
내가 그들과 나눈 대화는 책을 사려는 손님과 책방 주인이 나눌 수 있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도장을 찍어주었던 남편(도선)은 하얀 얼굴을 하고 약해 보였지만 말과 표정은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정리를 하며 책방 올레 손님을 뒤돌아보며 웃어주던 아내(진희)는 참으로 곱고 역시 부드럽고 상냥한 표정의 여성이었다.
그들의 얘기가 실없이 궁금해졌다. 기사를 검색하고, 블로그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그들의 만남과 여행을 직접 쓴 이 책을 지금 읽고 있다. 이런 만남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이제 2장까지 읽었다. 담담하게 읽고 있는데 책의 문장에 줄을 긋고 있다. 책에 선을 긋는다는 것은 문장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문장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얘기가 자꾸 나를 건드리고 있다. 그래서 조금씩 정리해 두어야 한다.
<도선의 문장>
서점은 작은 우주와 같았다. 다양한 손닙들을 상대하면서 매일같이 생겨나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때론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픈 이야기들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서점 안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은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세상 어는 직장에서도 이런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순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겐 서점이 일터가 아니라 삶 자체였다. (55쪽)
서점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 있다. 오픈 한시간 전, 캄캄한 서점 안에 홀로 있는 시간이다. 간밤에 그윽하게 토해낸 책 내음, 심연과도 같은 적막함, 흐트러진 책을 보고 있노라면 삶과 죽음과 존재를 초월하는 압도적인 무언가가 아우르는 느낌이었다. 다른 어떤 것도 침범할 수 없는 나와 책, 둘 만의 시간, 베인 마음을 다듬는 시간, 내 몸에 축복을 축척하는 시간, 이 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된것만 같았다.
내게 서점은 치유와 위로의 장소였다. 이런 내가 서점을 그만 둔다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서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57쪽)
독서하는 사람이 줄어든 것은, 서점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든 것은, 멕시코처럼 다채로운 서점과 서점다운 서점이 대한민국에 없는 것은, 사람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삶에 여유가 없는데, 매일매일 삶에 쫓기고 있는데 책이 무슨 소용일까. 그저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이겨내는데 바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해서 책을 읽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의 답 또한 아마 책일 것이다. 책을 읽혀서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게 하는 것, 그거이 서점이 해야할 일이고 살아남는 길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을 하는 서점들이 국내에 몇개나 될까? 아마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 메시코시티에 있는 수백 개의 서점들은 항시 대채로운 문화행사를 마련해 독서교육을 강조하고 있었다. 특히 낭독회 행사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책을 함께 읽고 또 읽어줌으로써 독서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알리고 있었다. 지하철이나 공원벤치, 잔디밭에서도 책 읽는 사람들로 가득했다.(151쪽)
<진희의 문장>
가고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이게 우리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관이다. 그렇게 원하는 방향으로 걷다 어딘가 오래 머물만한 곳이 생기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작은 서점을 차린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영원히 죽지 않는 정신이 담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아이들을 모아 함께 뛰놀고 서로 배우며 올바른 가치관이 말하는 대로 움직인다.
이것이 우리가 세운 구체적인 삶의 모형이다. 예전에 나눴던 이 대화를 회상하며 이야기하다 남편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우리 여행 떠날래?"(52쪽)
품에 품고 앞으로 나가는 길을 닦아주기보단 등을 밀어 힘들더라고 어떤 길이든 가게 하셨다. 그러나 아주 힘이 들 때 돌아보면 기대쉴 수 있도록 뒤를 든든히 받쳐주고 계셨다.(63쪽)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런 상념에 빠질 수 있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여행이 주는 첫 번째 선물인 듯했다. 두렵지만 자신 있고, 설레지만 익숙한 그런 마음으로 새로운 땅에 도착할 것이다.(66쪽)
(중략)눈으로 대강 살펴보고선 결코 알아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곳을 오래 여행했지만 알지 못하는 게 많았고 내 마음로 평가했던 것이 많았다. 내가 살고 있는 땅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게 많은데 타국은 오죽할까. 나에 대해서도 평생 알아가고 있는데 타인에 대해서는 오죽할까. 걸핥기로 사물을 바라보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직접 듣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면 그 가치는 결코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깊이가 있건 없건 하고 싶거나 알고 싶은 것은 부딪쳐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83쪽)
람빵은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천국같은 곳이었다. 니나는 여행을 가면 조용히 그곳을 느끼는 시간을 갖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내게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를 맡고 햇살의 온돌도를 재며 그곳의 소리를 듣는다. 람빵의 소리를 들어보았다. 따뜻한 햇볕이 머리 위헤 머물고 바람은 가볍게 날아와 내 귓가에 소근대는 것 같았다.(87쪽)
나는 너른 잔디밭에 앉아 자연의 숨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넘치지 않는 곳의 힘을 빌려 잡념을 떨치려 애썼다. 여행 내내 끊임없이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고민했으나 그런다고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지난친 상념을 버리니 마음이 이토록 평화로울 수 없었다. 짧게나마 정신의 자유를 맛본 것 같았다.(115쪽)
우리는 이 초라함을 불쌍하다거나 불행하다고 여기면 안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려면 이 초라함까지도 가같이 수면 위에 올려 함께 누려야 한나. 신영복 선생님의 <함께 맞는 비>를 떠올렸다. 비오는 날 누군가의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 함께 비를 맞으며 동행하고 싶다(167쪽)
이곳에서 생활해보니 물질의 부족함은 불편함보다 친밀감을 많이 유발했다. 둘이 함께 설겆이를 하며 어깨를 나란히 포개고 있는 시간이 길었고, 가로등이 없는 탓에 해가 진 뒤에는 꼭 둘이서 앞뒤로 랜턴 불빛을 밝히며 손을 잡고 나가야했다. 둘러보니 이곳에는 혼자 있는 사람이 드문 것 같았다.(216쪽)
도저히 더는 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나는 가방 속 물건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배낭이 가변워지자 앞으로 나가가는 게 훨씬 편안해졌고 주변이 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여행을 하는 동안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잘했다 싶은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했다는 것, 그리고 미련의 무게를 줄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인생에서도 여행과 마찬가지로 버리지 못한 미련을 짊어지고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걷는다. 거기에 가서 행복할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것만을 확실하다. 욕심을 줄이면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하고 싶은 것은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보지 않고, 해보지도 않고, 저 너머 세상을 겁 낼 필요는 없다(288쪽)
결혼 직후 진희는 악성종양 환자가 되어 수술을 받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순간에 남편과 아내는 세상을 만나러 떠났다. 태국을 거쳐 라오스에서 당초의 계획을 바꾸어 중남미로 갔다. 멕시코와 콰테말라에서 느긋하게 여행하고 쿠바를 거쳐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캐나다로 갔다. 아내 진희의 심해진 신체의 아픔 때문에 여기서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집으로 가기전 진희가 사랑한다는 인도네시아 우붓에서 도선과 함께 재충전하고 여행을 마무리한다.
여행 후, 아내는 여전히 아팠다. 아프다고 삶이 멈춘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색깔대로 살아가기 위해 경남산청으로 가게 된다. 이 책은 여기에서 마무리 된다.
여행 에세이로 분류되어 있는 책을 오랫만에 읽었다. 지금 그들은 경남 산청이 아니라 제주 한림에 있다. 소망대로 <소리소문>이라는 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의 곁에 있고, 남편은 아내의 곁에 함께 있는 것 같다. 두 사람의 소망처럼, 바람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은 내가 바라는 세상과 닮아 있다. 책을 마무리 지으며 뭉클해졌다. 두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서점을 하면서 제주에 살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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