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 소설집 (2016). 상냥한 폭력의 시대, 문학과 지성사.
나이를 운운하는 것은 참으로 바보같은 짓이기는 하지만,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등에서 내가 느꼈던 작가의 문장이 주는 느낌은 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이 비단 나이 탓은 아니겠지만 굳이 계산을 해보면 이제 44세가 되는 작가가 쓴 문장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모두 7편의 소설은 각기 다른 인물과 배경을 그리고 있지만 뭔가 휑하고, 외롭고, 멀리 떨어져 누군가를 공허하게 바라보는 느낌이다. 삶에 사건에 정열적으로 뛰어들었던 이전의 문장에 비해 다만 이러저러한 그런 '삶'도 있는거지 뭐하고 냉소하고 있는 것 같다.
경이 되어 '안나'를 보는 것도, 자신이 살집을 찾는 진이 되어 남편 '유원'이나 자신의 집에 대한 태도도 거의 남의 얘기 하는 듯하다. '영영, 여름'에서 이 나라 저 나라 본의 아니게 떠돌고 있는 아이 '와타나베 리에'는 자신의 엄마에 대해 말할 때도 북에서 온 친구인 '메이'를 대할 때 보다 더욱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다. '밤의 대 관람차'에서 고등학교 선생님 양은 자신의 첫사랑인 '박'이 하던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장'에게 중년의 설렘을 느끼지만 그 설렘 마저 너무 담담하고 밋밋하다.
이전 작품에서의 뜨거운 정열은 전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을 나는 나이란 이름으로 시간을 건너온 작가의 변화가 아닌가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런 그녀의 작품이 참 좋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해본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쓸쓸함이 잔뜩 묻어나는 문장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문장들
고양이 인형 싹싹과 사는 독신 남자 희준, 아버지의 옛 여인 성격 좋은 미스조, 미스조가 키우던 거북이 바위.
이제 마흔이 된 그의 아파트에는 움직일 수 없는 인형인 싹싹이 있고, 아주 천천히 느리게 움직이는 바위가 가족이다.
'늙는다는 것은 참을성을 잃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사실은 여기 오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모르는 골목을 마냥 걸었지. 끝을 자꾸 늦추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생각했지. 그렇게 한참을 걷고 있는데 문득 옆을 보니 남자가 같이 걷고 있었어. 그 남자는 뛰어나간 여자를 찾아 골목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거야. 남자는 여자가 우는 걸 봤겠지만 눈문을 닦아주지는 않았어. 여자는 이걸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어. 그날 오후에. 둘은 아주 천천히. 마치 그 낯선 동네에 집을 얻으려는 나이 든 신혼부부마냥 골목 여기저기를 구경하고 다녔어.(31쪽)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류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31쪽)
아무것도 아닌 것
남편, 딸 보미와 가족인 엄마 지원
아들 승현과 가족인 엄마 미영
고2인 딸이 임신을 하고 미숙아를 출산했다. 미숙아는 당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데 수술 동의서의 사인을 게속 미루고 있다. 딸을 낳고, 아들을 낳고 살아가는 엄마의 문장. 딸이 있고 남편도 있지만 여성인 지원의 생각, 홀로 아들을 키우며 남자 친구를 둔 부동산 중개인 인간 미영의 생각.
너무 잔인한 것들에 익숙해져 버린 탓일까..... 걷져 남길 문장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다.
'가끔은 이렇게 > I Love BOOK^^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4 & 25. 두 권의 책 (0) | 2021.05.18 |
---|---|
22. 오늘이 마지막은 아닐거야 (0) | 2021.05.02 |
20. 당연한 것들 (0) | 2021.04.27 |
19. 정이현(2012). 사랑의 기초_연인들 (0) | 2021.04.19 |
18. 요나(2018). 재료의 산책 (0) | 2021.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