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2012). 사랑의 기초_ 연인들, (주)문학동네.
서른살, 약 이년 동안. 각자였던 두 사람이 만나 다시 각자가 되어가는 시간의 얘기.
처음의 설렘, 공통점을 찾아 기뻐하는 시간. 익숙해져 가는 시간. 익숙함이 편함으로 바뀌는데 걸리는 잠시의 행복. 편함이 권태로움이 되고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크게 다가오는 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이미 각자인 그들이 진짜 각자가 되는데 필요했던 아주 긴 시간.
작가는 이를 <완벽한 착륙>이라 했다. 서로가 다치지 않고, 서로의 삶이 달라지지 않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 이별. '민아'와 '준호'는 서로를 '완벽한 추억'으로 기억할까?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이런 표현들이 참 좋다. 사랑의 시작은 모든 것이 달콤하니까. 그저 평범하고 우연했던 각각의 사건으로 서로가 엄청난 인연으로 만난 것 같은 얘기를 꾸미는 사소한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좋은 시간이므로......
"얼떨결에 종이컵 하나씩을 받아들고서 민안와 준호는 나란히 길 위에 섰다. 그때 그들은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어디로도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민안와 준호는 봄밤 속으로 함께 걸음을 내디뎠다. 처음 보는 별들이 뒤를 따랐다.(107쪽)"
"두 개의 서로 다른 포물선들이 공중에서 조우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겹쳐진 순간에 대해여, 그 경이로운 기적에 대해여 어떻게 탄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기적은 조종 태연한 일상의 방식으로 구현되곤 했다. 이제 막ㄱ 사랑을 시작한 젊은 연인에게 한없이 평범해 보이는 매일의 일상, 그 틈새에 숨겨져 있는 치명적인 운명의 조작들을 찾아내는 일은 경이로운 놀이였다.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우연의 세목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자신들이 마침내 지금 여기 함께 있다는 사실은 진실로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감격했다.(109)쪽"
"만나지 못하는 날은 잠들기 전까지 긴 통화를 했다.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나누는 언어, 귓속에서 속살거리며 울려퍼지는 언어는 잠시의 빈틈이나 어색한 공백 없이 물밀듯 밀려들었다.(113쪽)"
소설가는 이렇게 대단한 존재이다. 나는 소설가 정이현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문장들이 좋다.
'그들의 사랑이 지금 고갈되어가고 있다 해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이별과 맞닥뜨릴 때마다 '죽고 싶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목숨을 끊으력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비련의 사랑을 애꿎은 생명으로 되찾으려 드는 무모한 젊은니도 없지는 않았지만 목적을 이룬 숫자는 매우 미미했다. 눈물은 오래지 않아 마를 것이고 그들은 머지않아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것이다. 다소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되기를 반복하다보면 청춘은 저물어갔다. 세상은 그것을 보편적인 연애라고 불렀다. 대개의 보편적 서사가 그러하듯 단순하고 질서정연해서 누군가에게는 아름답게, 누군가에겐 참을 수 없이 지루하게 여겨졌다.(201쪽)'
"일어날까?"
준호가 먼저 제안해준 데 대해 민아는 조금은 섭섭하고 조금은 후련했으며 많이 고마웠다. 마침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별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합의는 없었다. 이혼을 앞둔 부부가 아닌 다음에야 이별 합의서에 서명하는 연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한 연인에겐 나눌 것은커녕 남아있는 것도 거의 없기 떄문이다. 그들이 무언으로 동의한 부부은, 더 오래 같이 있으면 아무도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들은 사랑을 지속하는 데에 실패했으나 어쨌거나 이별을 위한 연착륙에는 실패하지 않았음을 알아야했다. 비행기 동체도 부서지지 않았고 크게 다친 사람도 없다고,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한때 뜨거웠던 열정이 느린 속도로 사그라져가는 것을 함께 지켜보았다는 측면에서 그들은 고장나 조정간을 끝까지 지킨 기장과 부기장처럼 서로에게 동지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리라."
이제 여름밤을 태웠던 사랑이 끝났다. 준호를 만나기 전의 민아와 민아를 만나기 전 준호는 더이상 아니다. 누구를 만나 연애를 하든 결혼을 하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갈 것이다.
'가끔은 이렇게 > I Love BOOK^^ '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 상냥한 폭력의 시대 (0) | 2021.04.28 |
---|---|
20. 당연한 것들 (0) | 2021.04.27 |
18. 요나(2018). 재료의 산책 (0) | 2021.04.10 |
17. 현기영(1999). 지상에 숟가락 하나 (0) | 2021.03.21 |
15. 정이현(2009), 너는 모른다 (0) | 2021.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