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기영(1999). 지상에 숟가락 하나, 실천문학사.
현기영 작가가 스스로 쓰는 성장소설이라고 할까? 초등학교 시절 겪었던 제주의 아픈 역사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인 작가가 고향을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라고나 할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과 고백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태어난 고향 함박이 굴을 떠나면서 시작하여 중3 지독한 사춘기의 기억 <시스터보이>로 끝이 나고, 이제 환갑이 가까운 나이의 작가는 서둘러 <귀향 연습>으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한다.
4.3의 경험을 통과할 때나 6.25 전쟁의 경험에서는 이 시대가 겪었던 아픔과 고통에 마음이 메었다. 하지만 잔인한 역사의 시간도 변함없이 흘러 사춘기를 맞은 작가가 경험한 소년들의 솔직한 원색적 성장 경험에서는 어처구니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은 374쪽의 그 양이 엄청나게 많다. 쉽게 읽히지 않는 전반부와 어이없는 반전의 후반부가 존재한다. 드라마로 치자면 묵직한 역사소설로 시작했다가 시트콤으로 끝이난 것 같은 느낌. 마치 제주 올레 7-1 코스가 그랬듯이.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다면 한가지만을 갖고 가자. 책에서 얻은 몇 가지를 정리해 본다.
현기영은 1941년생으로 제주시 고형이 고향이다. 1947년과 1948년 당시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4.3 민중수난을 초등학교 시절 건너왔다. 그의 유년의 경험은 바로 한국전쟁까지 이어진다. 어릴 적 힘든 기억을 이렇게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힘들었기 때문일까. 인간은 너무 힘들면 본능적으로 잊어버린다고 하던데.
저자는 말한다. 이성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 있다고. 몸과 마음에 새겨진 것들. 잊혀진 것들이 <오관의 감수성>에 의해 되살아난다고, 눈에 의한 것은 흔하지만 냄새, 소리, 맛, 피부 감각에 의해 잊힌 기억들이 깨어난다고.
해방 후 제주의 땅에서 벌어진 학살은 무능한 우리 정부가 벌인 일이다. 일제의 왜곡된 조직을 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 미군이 들어오고 미군과 이승만 정부는 국가를 안정화시킨다는 명분으로 체제를 반대하는 백성들을 폭도나 빨갱이로 몰아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특히 제주에서 더욱 저항이 컸다. 제주는 섬이다. 사람이 살기에 척박한 산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땅이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사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누군가 죽음의 위협을 한다데도 도망갈 곳이 없다. 그저 바다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땅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사는 방법을 일찍 알았다고 본다. 그런 제주 사람들의 눈에 정부가 하는 짓이 올바르게 보였을 리 없다. 바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 하니 빨갱이라 몰아 죽인 것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제주 사람 전체를 대상으로 토끼몰이를 한 것이다. 그것이 4.3인 것이다.
4.16 세월호가 침몰된 지 아직 채 10년도 안되었지만 우리는 그 날을 자꾸 잊어버린다. 잊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라 변명하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 4.16 세월호이다. 마찬가지로 제주의 사람들에게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것이라면 4.3의 기억이 아닌가 싶다. 내가 제주 올레를 걸으며 그래도 알게 된 한가지라고 하면 제주는 그저 내가 위로를 얻으러 가는 풍광 좋은 곳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 존재하는 그것도 지독한 아픔이 존재하는 땅이라는 것이다. 일개 여행자가 그러할진대 그 폭행을 유년시절 겪은 작가의 온몸에, 신경세포 속에 남아있지 않다면 그것 조차 이상한 일일 것이다.
아픔 속에도 아이들은 자란다.
철부지 개구쟁일 적을 4.3의 수난으로 통과해 온 저자는 그때의 기억을 너무나 아름답고 섬세한 문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빨리 읽고 치우기 어렵다. 스치며 읽을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장이 많다.
그러나 절절한 문장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매우 잔인하다. 저자는 어린 날 토벌대에 의해 잘린 머리통이 제주의 땅에 나뒹굴던 것을 잊지 못한다. 내면 깊숙이 트라우마가 되어 통으로 떨어지는 '동백'꽃 조차 아름답게 보지 못한다.
'겨울철 제주를 찾는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더 어렸을 때는 떨어진 그 통꽃에 입을 대고 꽃물을 빨며 즐거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 아니 꽃잎 한 장씩 나붓나붓 떨어지지 않고 무거운 통꽃으로 툭툭 떨어지는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모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65쪽)
한라산 자락에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었던지 그 해 겨울과 초봄에 까마귀 떼들은 광란의 춤을 추었다고 한다.
저자는 황혼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한다.
'한라산 초원에 황혼이 무르녹으면, 그 떄를 상기시키면서 붉은 저녁놀이 서편 하늘을 온통 불 질러 놓고 검은 숲을 화염으로 휩싸 불 갈기를 너울거리게 한다.'(70쪽)
어린 날이 몽땅 괴롭고 절망스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글을 남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주의 일상에서만 어린이 만이 느낄 수 있는 사건들을 일기를 쓰듯 적고 있다.
똥돼지와 함께 키우는 칙간은 오히려 돼지 덕분에 깨끗하다고 한다. 인간과 동물의 공생이 희한하다. 누구나 그렇듯 밤에 칙간을 가는 일은 귀신 생각 때문에 무서웠지만 칙귀(변소 간 귀신)를 잊게 해주는 것이 돼지였다고 하니 역시 동물은 인간의 동반자인가 보다.
' 그 섬 고장의 칙간은 너무도 마음 편한 곳이었다. 말이 칙간이지 그것도 벽도 지붕도 없이 한 데에 디딤돌 두 장을 걸쳐놓고, 돌 몇 덩이로 앞만 가린 것에 불과했다. 밝은 햇빛 속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방분한다는 것은 얼마나 쾌적한 일이었던가. (중략) 휴지 대신 부드러운 풀을 한 줌 뜯어서 , 아니면 햇빛에 잘 데워진 동그스름한 돌멩이로 밑을 닦을 때의 쾌감은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104쪽)
6.25 전쟁 통에 피난민이 제주로 몰려들었다. 서울에서 온 여자애에게 마음이 뺏겼다.
'특히 서울내기 들은 그들이 사용하는표준말 때문에 인기가 좋았다. 국어 시간만 되면 담임선생님의 부름을 받아 시범 낭독하던 형식이와 우리 동네에 이사와 살던 송이와 장수 오누이가 내가 사귄 서울 아이들이었다. 나는 송이를 속으로 은근히 좋아했는데, 그 계집애가 하는 서울 말씨를 들으면 어찌나 곰살맞고 간드러지던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곤 했다. "깅아, 안녕? 잘 잤니?" 아침 등굣길에 듣곤 하던 그 인사말이 얼마나 듣기 좋았던가. 그때까지 그보다 더 상냥한 말씨를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서울 말씨가 워낙 그런 줄 모르고, 그 애가 나를 좋아하나 보다, 하고 오해할 지경이었다.'(148쪽)
병문천을 놀이터삼던 아이들에게 용연도 마찬가지 놀이터였다. 나에겐 올레 17코스 비경 중 하나이고, 관광객에겐 그 푸른빛과 용연교의 다리가 멋진 인생 샷을 만들어주는 장소이지만. 그 깊은 물에서 아이들은 이미 익힌 개구리헤엄을 더 빨리 나가게 세련시키고, 크롤이나 송장 헤엄, 잠수질도 배웠다고 한다. 엄마는 못 가게 했지만 참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니었을 시절. 여름이면 해수와 지하수가 만나는 거기에 파래가 자라고 수염발처럼 가늘고 부드러워 놓은 반찬거리였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여행지로 스쳐가는 곳이 누구에게는 어린 날의 짙은 추억이 자리한 곳이다.
"삶이란 두려움의 대상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들은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을 극복하여 더 커지려는 욕망, 자신보다 더 큰 아이를 따라잡으려는 안간힘. 그래서 우리는 서너 살 적부터 자기보다 더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연습을 자주 하지 않았던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는 사람 없어도, 무릎이 깨져 피가 나더라도, " 새다리는 꺾어지고 내 다리는 꺾어지지 말라!" 하고 주문을 외움 높은 데서 뛰어내리곤 했던 것이다."
작가는 고열로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 전공이 이것인지라 <외짝귀, 231쪽>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러나 열병이 할퀴고 간 상처는 며칠 지나서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 전과 달리 뭔가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나보다 먼저 어머니가 그걸 발견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화를 내며 소리친 어머니......
"요 녀석 보라. 어멍이 말하는디 또 못 들은 척이여?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아니, 무슨 말? 난 못 들었는디......."
"귓구녁엔 당나귀좆을 박아시냐? 바로 옆에서 한 말도 못 들어? 세 번이나 말했는디!"
"정말, 난 아무 말도 못 들었는디......."
"아니, 그러면, 혹시......."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어머니가 나한테 달려들었다. (중략)
'내 왼쪽 귀는 완전히 절벽이 되어 있었다. 열병이 왼쪽 귀의 청신경을 태워버린 것이다. 청신경이 타버릴 지경이었으니 내가 얼마나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한 발짝 더 깊이 빠졌더라도 큰일 날 뻔했다. 목숨을 잃거나 양쪽 귀 모두 먹어 농아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머니의 말마따나 그 정도에서 끝난 것만 해도 삼신할머니 덕분이었던가 보다.
이후 작가는 <편측 청력손실>을 설명하는 <청각학> 교과서에 흔히 나오는 내용을 자신의 경험으로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변화에 적응될 때까지 힘들었던 것, 소리의 방향을 구별할 수 없어 누가 부르면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 했다는 것,,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지 못하고 한 바퀴 돌아야 했다는 것, 들리는 오른쪽 귀가 크게 자라는 악몽을 꾸었다는 것, 말을 잘못 알아들을까 신경과민이었던 자신. 체육 선생의 구령을 못 들어 기합을 받았고 그 때문에 어린 나이에 요실금까지 겼었다는 이야기들.
내가 난청인들과 면담할 때 흔히 들을 수 있었던 난청의 증상을 이 소설에서 만났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릴 적의 경험인데 자세히 기억하는 것도 신기했다. 장애를 인식한 날의 경험도 마찬가지의 아픔으로 각인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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