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29. 정한아(2017). 친밀한 이방인

Jeeum 2021. 6. 16. 09:24

정한아 장편소설(2017). 친밀한 이방인, 문학동네.

 

드디어 한 학기가 끝났다. 당연한 내 일이지만 매일매일 전쟁을 치르듯 수업을 했다. 수업 양이 많았던 것이다. 수업 양이 많은 것은 지극히 현실적 이유였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컸다. 함께 나누어줄 동료가 없어 더욱 일이 갖는 무게가 컸다. 15주 단축 학기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어째튼 학기의 수업은 모두 끝이 났다. 하지만 난 여전히 수업이 남아있다. 그러나 방학이라는 것은 좋은 것이다.

 

마음껏 소설을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서둘러 도서관에 가서 8권의 책을 빌렸다. 닥치는대로 읽을 것이니 고를 것도 없다. 손에 잡히는 대로 솎아오면 된다. 읽다가 시들하면 멈추면 되고, 읽고 싶지 않으면 안 읽어도 된다. 읽다 보면 얻는 것이 있고 적어도 읽는 동안은 행복하기 때문이다. 

 

어제 읽기를 마치고 새로 들고 나온 책이 이 것이다. 다시 젊은 작가의 세계로 발을 들여 놓았다. 보랏빛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를 한 귀부인이 대형 불투명 마스크로 아예 가려놓은 얼굴이 그려진 표지가 뭔가 숨기고 있는 듯한 그런 야비함이 느껴진다.  

 


소설가인 나, 3권의 소설을 쓰고 영국에서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수도권 대학에서 교양 글쓰기를 가르친다. 영국 유학시절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딸이 있다. 어느 날, 신문에서 자신이 썼다는 사실조차 가물거리는 소설을 쓴 사람을 찾는다는 기사를 본다. 그 책을 통해 '이유미(M)'를 알게 된다. 희대의 사기꾼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녀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한다. 소설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이 얘기가 되어 소설의 문법을 이루고 문장이 계속 흘러간다.

 

이유미는 양공주들이 지나다니는 동네에서 지적장애 엄마와 불행한 양복쟁이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빠는 딸을 공주처럼 차려 입힌다. 딸은 그 속에서 거짓말로 사는 법을 익힌다. 일부러 누군가를 속이려고 그런 건 아니지만 굳이 진실을 말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채 계속 거짓말을 하면 살아간다. 대학생이 아니면서 S여대 편집국에서 기자로 일을 하고 기자였기 때문에 만난 남자와 사랑을 한다. 학위를 위조해 피아노 레슨을 한다. 그녀의 연주하는 모습에 반한 은행원을 만나 결혼을 한다. 평생교육원에서 예술을 강의하고, 잘 나가는 부유한 성형외과 의사를 만나 결혼을 하고 대학 강의를 하고 심지어 전임강사가 되기도 한다. 거짓이 드러나면 그대로 정리를 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숨을 쉬고 다시 더 큰 거짓말을 하며 의사가 되었다가 다시 이유상이라는 남자가 되어 신문에 광고를 낸 '진'과 함께 살았다.

 

소설의 화자인 소설가 나는 '진'이 자신의 사랑과 삶을 위해 이유미와 꾸민 마지막 사기를 계기로 다시 자신의 삶인 소설을 시작한다. 이것으로 소설은 소설로 마무리된다.

 

소설의 첫문장을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연과 사건과 거짓과 음모와 혼돈과 갈등과 버림과 버려짐이 존재했는지.. 그만큼 평범 뒤에 음모가 너무 커서,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해야만 비로소 시작할 수 있는 나약한 우리들 자신이 소설의 주인공 이유미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첫 문장이 제일 어려웠다. 늘 그랬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지우고, 마침내는 지우는 것이 쓰는 것보다 앞서는 지경이 됐을 때 우연처럼 한 문장이 남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면서 첫 문장을 지나 다음 문장으로 나아갔다. 검은 활자가 마치 발자국처럼 새겨졌다. 문장은 부끄러울 만큼 성기고 거칠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가 불편하고 낯설지만, 짐짓 호기를 부리며 눙치고 넘어갔다. 백지는 나를 밀쳐내지 않았다. 받아들여졌다는 기쁨에 나는 좀 더 파고들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얇고 가벼운 키보드를 두드리는 느낌. 그 희열이 두 손을 따라 전신으로 퍼졌다. 월요일 오전, 카페 '이층'의 투명한 창문을 통해 깊고 따뜻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253쪽 마지막 문단)

 

인생은 늘 그럴지도 모른다. 시작이 이토록 어렵다. 그러나 인생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는 것도 너무 힘겹다. 글을 쓰는 작가도 삶을 사는 사람도 모두 이럴 것이라고 내멋대로 일반화시켜 본다. 정한아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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