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32. 영원한 유산

Jeeum 2021. 6. 20. 09:17

심윤경(2021). 영원한 유산, 문학동네.

 

작가의 소설은 처음이다. 언제나 그렇듯 '문학동네'의 책은 의미가 있다. 표지에 은박으로 새긴 거창한 근대건물이 무슨 박물관인가 싶었고, 제목에서 연상되듯 그와 관련된 얘기라고 추측했다.

 

뒤표지에

 

' 이 세상에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잊힌 것과 존재하는 것

오래된 소명과 새로운 운명

이분법 시대가 남긴 새로운 회색지대

경계에 선 인물과 시대의 초상을 만나다.   

 

 

뭔가 묵직한 서사가 있을 법하지 않은가. 더운 여름날의 독서는 이런 무게감이 있어도 어쩜 신선할지 모르니까. 그러나 사실 '신착도서' 코너에서 이 책을 뽑아온 이유는 여름을 닮은 짙푸른 초록이 유혹했기 때문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주인공은 '해동'이다. 영어로는 '헤이든'이라 불린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찍 죽은 아버지의 아들. 어머니마저 잃고 선교사의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 자연스럽게 영어에 익숙하다. 미군부대에서 일했고 1966년 지금은 '언커크(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n Korea; UNCURK)의 대표 호주인 애커넌의 개인비서 겸 통역비서로 일한다. 이들이 근무하는 언커크는 한때는 벽수산장이라 불리던 악명 높은 친일 귀족 윤덕영이 지은 유럽풍 저택이다.  

 

이들 앞에 악질 친일귀족이었던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이 출소하고 찾아온다. 윤원섭은 날선 일제강점기 계급사회의 먹이사슬의 최정상에서 어려움 없이 자란 친일파의 자식이다. 복잡한 가족관계는 기본이지만 태생적으로 귀족 행세에 능하다. 자신이 살던 벽수산장은 엄연히 적산이고 친일의 유적이지만 운원섭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되찾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악질 친일이라 부르는 사람들 앞에 공공연히 민족과 국가를 사랑한 예지력 높은 사람을 알리고 모든 것을 되돌리려 한다. 친일의 행적을 그림자 속에 묻고 자신의 화려함을 찾기 위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방법의 치사함도 불사하는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보며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해동은 혼란스럽다.

 

자신의 몸과 마음, 가족과의 행복한 삶과 삶을 바치는 최소한의 경제력마저 모두 독립운동에 바치고 사라졌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자손이 스스로 힘없이 자취없는 인생을 살았던(해동) 것에 비해 친일로 잘 먹고 잘살았던 이들(윤원섭)은 여전히 권력적이어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고 여전히 뻔뻔하여 스스로 존재는 귀하고 당연하다고 여긴다. 이들 중에 누가 잊혀야 하고 누가 존재해야 하는가.

 

작가는 아주 어릴 적 할머니와 찍은 사진의 배경에서 옥인동 벽수산장을 보았고, 그것이 친일의 상징적 건물이며 그곳에 언커크가 있었고 불에 타 아예 사라지기 전 자신이 살고 있는 서촌 사직동에서 쉽게 보이는 아름다운 건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팔 년간을 궁리한 끝에 이 소설이 나왔노라고 했다. 생각보다 무게감이나 박진감은 없었다. 하지만 해동이라는 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독립운동의 유전자가 이런 것임을 알 수 있었고,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이는 서촌을 걸어보면 금방 이해된다.) 친일의 유전자는 또한 어떤 것인지 윤원섭과 언니 윤성섭이라는 인물로 충분히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일제, 근대화도 우리의 역사이다. 그 시절을 건너온 사람들이 살았던 골목과 집 그리고 이야기들이 여기저기 향수를 일으키는 장소가 되고 있다. 일제시대 조선 총독부였던 서울 옛 시청 건물은 이제 없다. 경복궁의 입구를 가렸던 그 건물을 두고 없애는 것이 맞는지 보전하고 남겨야 하는지에 대해 설왕설래가 있었던 기억이 있다. 1965년 우리는 한일협정을 다시 맺고 적과의 동침을 시작했다. 공동의 가치보다 개인의 이익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이건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들이 남긴 것들이 유산이어야 하는지 자산이어야 하는지 모호하다. 작가처럼 경계에 선 우리들은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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