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36. 여행자의 철학법

Jeeum 2021. 8. 2. 10:29

김효경 (2011). 여행자의 철학법, 웅진지식하우스.

 

여름날의 아침은 동트기 전 새들의 요란소럼으로 시작한다. 무엇을 재촉하는 걸까. 조막한만 몸으로  인간의 잠을 몰아내는 소리를 낸다. 해가 뜨면 매미가 운다. 운다는 표현은 너무 부드럽다. 몸집은 작아서 순해 보이는데 소리는 엄청난 것이다. 넌 또 왜. 이렇게 시끄럽게 하는 거니! 널 달래기 전에 내가 지쳐 나가떨어질 판이다.

 

일요일 아침. 사람들은 아직 잠에 취해있는 듯 조용하다. 움직이는 차량도 없는 걸 보면 8월 첫 번째 하루를 휴기지에서 보내고 있나 보다. 텅 빈 도시를 새와 매미, 그리고 그들이 내는 소리로 채워졌다.

 

도시에 남은 나는 궁리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이 소음으로부터 격리될 수 있는지.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일단 에어컨을 돌린다. 이 공간이 시원해지도록. 긴 팔 옷이 생각날 만큼. 실내가 시원해지는 것과 비례해 기계가 돌아가는 소음이 가득하다. 외부로부터의 공격과 내가 질러놓은 기계가 내는 소음이 여름의 대명사가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살짝 추워졌다고 느끼는 순간, 모든 문이 닫힌 공간에 에어컨을 끈다. 우와! 조용하다. 거실 마룻바닥을 차지하고 자고 있는 조카도 덜 밉다. 움직이기에 적당한 온도와 한껏 낮춘 선풍기의 회전 소리와 냉장고의 소리 만이 들린다. 소음이 아니라 소리로서 들린다. 뇌가 조용하다고 느낀다. 함께 기분 좋은 행복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난 책을 읽는다. '여행자의 철학법' 여행 동안 읽으려고 계획했으나 여행지의 책방에서 산 책을 읽느라 제쳐두고 차에 실려갔다 실려온 불쌍한 책이다. 도서관으로 반납하기 전에 우선 너를 내 마음속에 가두어 둘 것이다. 꼼짝 마라!

 


월요일 아침. 8시 20분.

 

매미도 주말이 끝났음을 알고 있는 듯 정말 요란하게 운다. 일출을 부르는 새들은 이미 실컷 노래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지런한 청소부가 덜컹덜컹 소음을 내며 잔뜩 쌓인 잔폐물들을 들고 갔다. 세상이 조용해질 틈이 없다. 특히 월요일 아침에는.

 

여름날의 동변동은 시끄럽다. 짧은 이틀(주말) 동안 잊고 살다 여지없이 아침을 부서뜨리는 소리를 듣게 되면 여기가 내 집이라는 의식의 공간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몰려온다. 오늘 아침은 좀 더 심하다. 어디 전쟁이라도 나는 것인가. 아님 심심한 파일럿의 장난인가. 저 소음을 이길 도리는 없다. 골을 울릴듯한 소음을 도저히 사랑한다고 말할 순 없다. 매미소리가 베이스를 깔고 가끔 뛰쳐나갈 것 같은 굉음의 음표들이 나부낀다고 최면을 건다. 베토벤이 운명교향곡을 지휘하고 있다고 착각을 해본다. 그러면서 나는 책을 본다. 그래야 이 아침을 맞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날마다 소음과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에휴"라고 할지, "앗싸"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아시시와 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란체스코 성당 앞에는 독특한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이 동상은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키는 탄탄한 기사의 모습도, 전화번호부 두께의 책을 든 근엄한 수도자자의 모습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고개를 수그린 채 말을 탄 연약한 기사의 동상이 있다. 기사와 그가 탄 말은 모두 오랫동안 길을 걸어온 듯 지쳐보였다. 결승점 직전의 마라톤 선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58쪽)


볼타핀타와 윌리엄 오컴

 

여행을 하면서 또하나 얻은 것은 '개인적 공간'이 생기는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스쳐가지만 여행자 스스로에게만은 일생의 시간 중 책갈피에 꽂게 되는 장소 말이다. 이 여행에도 내게 그런 곳이 생겼다. 첫번째는 눈물을 흘렸던 아시시 골목의 돌계단이며, 두 번째가 볼타 핀타이다.(69쪽)

 

여행을 시작한 지 사흘도 지나지 않아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정확히는 여행사와 여행 광고를 만든 이들과 아리따운 사진으로 채워진 여행서와 블로글에 장엄한 여행기를 올린 모든 이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들은 왜 내게 유레일의 모든 쿠페(취침용 칸)에는퀴퀴한 배낭객들의 악취가 배에 있으며, 대부분의 여행객은 트렁크에 딸려 오는 통통한 벼룩을 밤이면 언제 가방을 덮칠지 모르는 좀도축만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왜 여행을 지고지순하며, 인생의 꽃과 같고, 해가 될 것이란 전혀 없는, 여유와 내면의 성찰과 명상과 사색과 일탈과 자유로 이루어진, 인생의 우윳빛 행복이라고만 말해왔던 걸까. 내가 겪은 바로는 적어도 여행을 통해 성찰이니 사색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음에도 말이다.(80쪽)   

 


 

피렌체와 프란시스 베이컨

 

나는 청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실제로 위로받은 것은 나였다. 우울한 성당에 심란했던 마음이 청년의 곱슬머리를 보니 조금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좁은 도시를 여행하다 보면 종종 비슷한 동선으로 움직이는 관광객들과 만나고, 그러 때마다 훈훈한 동지 의식 같은 것이 생기곤 했다.(123쪽) 

 

 

 

르네 데카르트와 르네상스

 

새로운 것을 말하는 것에는, 마음속에 들끓고 있는 것은 말하는 것에는 크든 작든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솔직히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오래도록 기억된다.(173쪽)

 


 

베네치아와 에밀 뒤르켐

 

그리고 좁은 베네치아를 몇 바퀴고 무작정 걷기, 그러다 마주친 이름 모를 성당에 들어가기, 우연한 전시회 구경하기, 페시로 궁전이 보이는 다리 위에 넋 놓고 서 있기, 바포레토를 타고 마음이 끌리는 정류장에서 내리기, 쿱에서 쓸데없는 것들 사기, 아침 시장에서 과일과 햄을 사서 샌드위치 만들기, 광장 벤치에 안자 코를 훌쩍이며 카푸치노 마시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급기야는 베네치아에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17쪽)

 

출처 : 구글 검색 지도 캡처


 

밀라노와 마르크스, 크레스피 다다 근로자 마을

 

죽은 자의 공간도 공평하지 않다니. 세상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이 언제나 불공평했어. 사람이 사는 집의 크기는 그가 가진 재물의 양에 비례하고, 죽어서 묻히는 땅의 크기도 마찬가지이지. 내게도 언젠가 찾아올 죽음이 있을 거야. 죽음 뒤에 어떤 새로운 세상의 삶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생산하고 가꾸고 얻은 것은 이 세상에 주고 가는 것이 맞아. 사회주의가 되었던 자본주의가 되었건. 난 그렇게 느껴. 

 

나는 만약  이 여행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면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솔직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것이 마르크스에게 느끼는 내 부끄러움에 대한 스스로의 답이기도 했다. 며칠간 여행을 하는 것으로 내가 충격과 같은 큰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인류가 안고 있는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약간의 자책과 수치를 끌어안고, 가끔 분노하지만 쉽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당분간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 같다. 하지만 짧은 여행이 내게 약간의 변화를 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낮잠 시간이나 점심 이후의 휴식 시간을 아직도 지키고 있는 이탈리아인의 여유는, 우리가 쓸데없이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했다. 그리고 아직도 점심 후의 낮잠을 즐기며 사는 자본주의가 남아 있다는 생각은 나을 조금은 흐믓하게 했다.(274쪽)

 

나는 여전히 유약하고 얍삽하게 자본주의를 살아갈 테지만 작은 것이라고 옳다고 여기고 행동하는 순간 변화의 공기를 만들고 시스템을 바꾸는 시초가 될 수 있음을 믿기는 한다. 여전히 모순 속에 살고 있지만, 예전보다 더 자주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생각한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조차 한 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떄뜨려져도 다시 만들어질 수 있고, 완성되지 않더라도 시도는 될 수 있다. 시도조차 없다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275쪽)

 


로마와 레오폴트 랑케(Ranke) & 에드워드 헬릿 카(Carr)  

 

로마야, 너는 찬양받을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거야.

날시조차 그림같았다. 도시는 모든 면에서 나를 매혹했다. 고풍스러운 대리석 건물이며 어디서든 튀어나오는 수천 년의 유적들, 도시의 연륜처럼 덮여있는 이끼와 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수천년전, 수백 년 전, 수십 년 전 세워진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나느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들떴던 것 같다. 그렇게 로마 여행은 시작되었다. (281쪽) 

 

역사가는 망망대해에서 생선을 골라 좌판에 올려놓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308쪽) 

 


일상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비장한 표현이지만 내 발로 서있는 곳이 어딘지 의식하지 못하면 언제난 우울할 뿐이다. 그만큼 중요하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야한다. 내 몸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먼 곳에 마음을 두면 고통과 불만만이 생기고, 결과는 언제나 비참한 자신의 몫이다. 2박 3일이든 한달이든 여행은 여행이다. 내 일상을 그곳으로 옮겨 일하고 먹고 자지 않는 한. 진짜 여행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자체이다. 항상 즐거울 수도 항상 슬플지도 않는......   

 

다시 여행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날까지. 코비드19와의 전쟁은 계속된다. 인간이 이겨야 한다. 기필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