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43. 어디서 살 것인가

Jeeum 2021. 9. 9. 10:24

유현준 (2018). 어디서 살 것인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을유문화사.

 


 

그 사람이 사는 공간이 그 사람 자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공간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우리가 사는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건축가의 입장을 들어보고 싶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비판에 날이 서있다. '지식은 책에서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자연에서 배운다.' 맞는 말이다. 하늘을 볼 수 있고,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공간에서 몸을 부대끼며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형성하고 놀이를 생각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창의적이고 정의로운 생각이 자랄 수 있다고. 지금 우리 아이들의 학교는 마치 교도소와 같은 구조와 공간 구성이란다. 그런 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이상해질 수밖에 없다. 팔팔하다 못해 날아오를 것 같은 시기의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 

 

천정이 높고, 자연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저층 화하고 공간을 다양하게 만들어보자. 혁신적인 학교 공간 만들기. 이제 그럴 때가 되지 않았나???

 


제한된 공간 속에 사는 생쥐에게 물과 먹이를 잘 공급해주면 생쥐의 개체 수는 폭증한다. 하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자신들이 초래한 환경오염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자연스럽게 개체 수 증가가 멈추어진다. 완전 소름.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 않은가?

 

이런 일이 안생기게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공간은 어떤 것일까.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에는 사적인 개인 공간(집)과 사회적 교류공간, 그리고 여유 공간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내가 사는 집에 둘 수 없다. 개인 공간이 좁아지는 대신 나머지 공간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접근성이 중요하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공원, 카페, 도서관, 영화관 그리고 서점 정도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여기에 텃밭도 조금 필요하다.   

 

요즘과 같은 비상상황에서 집에 오랜 시간 머물러야 할 경우라도 마찬가지이다. 잠시는 참을 수 있지만 아무리 내 집이라도 사적 공간이 절절하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사적 공간 이외에 필요한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제 그 공간을 집안에 만들 것인가. 아니면 공공의 공간을 내(모두)가 필요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선택이 남는다. 당연히 후자이다. 사람이 살기에 좋은 마을, 동네 만들어보았으면.

 


제주 올레를 만나고 걷는 것은 나의 생활이 되었다. 노년이 가까운 내가 신체적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걷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살고 있는 동네에도 나름 좋은 길이 있다. 넓은 강과 하천을 따라 걷거나 산을 향해 걷기도 하고 일부러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아파트 동마다 걸어가 보기도 한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서지만 매일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즐겁지 않다. '걷고 싶은 길'의 조건은 다양한 풍경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다양한 가게일 수도 있고, 자연일 수도 있고, 다른 골목길일 수도 있다. 우연한 풍경들이 계속 다양하게 바뀌는 길. 풍경의 변화가 다채로운 길을 사람들은 걷고 싶어 한다고 한다. 내가 제주 올레에서 느끼던 생각이다. 역시. 사람들이 제주 올레를 찾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너무 넓은 길에서 사람들은 소외감을 느낀다고 한다. 자동차를 위한 넒은 도로는 황량하다. 사람의 속도에 맞추어 자연 발생적으로 만들어진 골목길이어야 하고, 거기에 다양한 체험이 있는 길을 사람들은 걷고 싶어한다. 걷는 것이 자연스런 일상이 된 나는 이런 길들이 이웃에 많아지길 바란다.

 

지금은 멈춰버린 유럽 여행. 내게 유럽여행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어느 도시이든 걷고 싶어진다는 것이었다. 제주 올레를 찾은 이유가 어쩌면 이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도시여행도 좋아한다. 눈요기거리가 많은 곳, 먹고 싶은 호기심이 잔뜩 일어나는 것들이 많은 거리들은 언제나 걷고 싶다. 무작정 이골목 저골목 걷다가 외향은 다르지만 나를 닮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것이 내 이야기같은 도시의 골목을 걷고 싶다. 이런 길들이 주변이 많아지길 소망한다. 


  

사람의 집을 건축하는 데는 벽, 창문, 기둥 그리고 지붕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개인적 공간인 집에서는 살 수는 없다. 길을 통해 외부와 소통하고, 소통의 힘으로 권력을 얻고 새로운 땅과 문화를 정복할 수 있었다. 길이 내기 어려운 곳에는 다리를 만들고 다리를 놓을 수 없는 곳에도 사람들은 작은 돌을 놓아 징검다리 마저 만들었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있던 길과 다리 그리고 징검다리에 대한 저자의 글에 깊은 공감을 느꼈다. 서귀포 중문천 자연이 만든 담수욕장에는 어김없이 징검다리가 있고 시원하게 그늘이 드리워진 다리 밑 은밀한 공간이 있었다. 사람들은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강을 오감으로 느끼고, 편안함을 느낀다. 큰 다리에서는 마주 오는 사람들을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징검다리에서 만난 사람들은 함께 문제를 풀고 내 공간을 공유해야 하는 이웃이 된다. 사람의 거리를 가깝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일까. 징검다리는 정겹고 따뜻하다. 우리 동네 동화천을 걸을 때 네 개의 징검다리 모두를 꼭 건너고 싶어지던 이유는 이 때문일까. 먼 유럽이나 일본 교토의 시골길에서도 징검다리가 보이면 건너고 싶어지고, 잠시라도 그 근처에 앉거나 강물에 발을 담구어야 하는 이유가 다리가 갖는 안도감때문이었을까. '징검다리'에 대한 그의 글을 잠시 필사해본다.


태초에 비가 내리고 물이 낮은 곳으로 모여 흐르면서 시내와 강이 생겼다. 이때 넓은 강은 배를 이용해서 건너고 작은 개울은 큰 돌을 옮겨서 징검다리를 만들어 건넜다. 건축학적으로 이 돌의 의미를 살펴보자.

 

우선 배를 타면 사람이 노를 저어서 물을 건넌다. 이떄 사람의 발은 수면보다 밑에 놓이게 된다. 배를 탄다는 것은 몸의 일부가 어는 정도 물에 잠긴 상태에서 건너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보면 배는 물속의 점이다. 사람이 물속에서 하나의 점 상태로 이동하면서 건너가는 구성이다. 이에 반해 징검다리는 점선이다. 징검다리는 개울의 양쪽 공간을 점선으로 연결한다. 사람들은 물위에 점점이 놓인 돌들을 밟고 건너간다. 사람의 발은 수면보다 몇 십 센티미커 위에 위치한다. 높ㅇ;로 보자면 사람이 수면 바로 위를 걸어서 건너가는 형상이다.

 

징검다라를 건너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우선 아래를 내려다 보면서 걸어야 한다. 보통 다리를 건널 때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지만 징검다리 위에서는 발을 잘못 내디디면 물에 빠지기 때문에 내 발을 보고 내 보폭을 생각하면서 걸어야 한다. 다음 돌까지 성큼성큼 건널지 아니면 한 발 한 발 내디딜지 순간순간 판단해야 한다. 디디고 있는 둥근 돌 위에서도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징검다리 건너기는 내몸을 민감하게 느끼면서 내 다리를 보며 걷는 특별한 건축 체험이다. 그 외에도 징검다리는 물위의 나만의 사적인 공간을 가지게 해 준다. 징검다리를 건널 때 내가 디디고 있는 작은 돌만큼의 면적은 온전히 내 공간이 된다. 주변은 물로 둘러싸여서 마치 성 주변에 해자가 만들어진 것처럼 확실한 나의 영역이 확보된다. 때론 마주오는 사람과 그 좁은 공간을 나누어야 한다. 징검다리 돌 위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 교차할 때는 서로 친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이 하나의 공간 다이어그램 안에서 가깝게 묶이는 순간이 만들어진다. 또한 징검다리는 하늘과 물 사이에 혼자 존재하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는 건축물이다.

 

 

징검다리는 물이 불어나면 사라지는 다리다. 물이 불어나도 항상 물 위에 군림하는 다른 다리와는 다르다. 그래서 징검다리는 때로는 자연에 양보하는 겸손한 다리다. 점선으로 연결된 징검다리는 수면의 높이에 따라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한다. 자연은 미세하게 변화해서 의식하기 어렵다. 개울이 수위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징검다리가 놓이게 되면 수십 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미세한 개울 수위의 변화에 따라 개울 양편이 연결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한다. 황순원의 <소나기>라는 단편소설을 보면 갑작스런 소나기로 물이 불어서 징검다리가 끊기게 된다. 이때 소년은 소녀를 등에 업고 개울을 건넌다. 그때부터 두사람 사이에 관계의 진전이 일어난다. 만약 같은 상황인데, 지금처럼 콘크리트 교각의 다리가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나기>라는 소설은 없는 거다. 소나기라는 갑작스런 자연의 변화, 징검다리라는 가변적인 건축 공간이 합쳐져서 만들어 낸 아름다운 이야기가 황순원의 <소나기>다. 이 소설에서 징검다리는 중요한 배역이다. 소설의 첫 장면이 바로 소녀가 징검다리에 앉아서 물장난을 하는 모습이다. 주면의 물에 둘러싸인 돌 위에 홀로 앉은 소녀처럼 집중되는 무대 배치는 없다. <소나기>를 보면 소설가 황순원이 건축 공간을 깊은 수준으로 이해하는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상 348쪽~350쪽을 옯겨쓰다.)    

'가끔은 이렇게 > I Love BOOK^^ ' 카테고리의 다른 글

47. 두 방문객  (0) 2021.09.11
46. 미시시피 모기떼의 역습  (0) 2021.09.09
45. 하쿠바 산장 살인사건  (0) 2021.08.29
44. 비밀과 거짓말  (0) 2021.08.18
42. 천국에서  (0) 2021.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