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산문집(2014).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제 1부 열정, 동기, 핍진성 : 소설학 개론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매일 글을 쓴다. 한순간 작가가 된다. 이 두 문장 사이엔 신인, 즉 새로운 사람이 되는 비밀이 숨어 있다.
나는 그 '검은 집(퍼크리샤 하이스미스)'이라는 게 소설가의 재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술집에 모여서 농담거리로 삼을 뿐 그 안에 뭐가 있는지 들여다 볼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는 집과 같은 것. 소설가가 재능에 대해 말할 때는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 떄다.
매일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할 수가 없다면, 음 무척 슬프겠다. 사랑하는 재능을 확인한 뒤에야 사랑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젊은 소설가여, 매일 그걸 해라.
내가 쓴 초고를 보면 내 머리통은 무슨 음식물 쓰레기통처럼 느껴진다. 글을 쓰려면 초고를 써야만 하는데, 초고를 쓰면 글을 쓰기가 싫어진다.
경험상 말하자면, 적어도 일주일은 이런 문장들을 쏟아내야만 소설의 문장을 얻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는 저마다 각자의 욕망이 있고, 이 우주의 법칙에 따라 그 욕망은 갖은 방해물로 인해 쉽게 충족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그들 모두에게는 하나의 이야기가 생긴다. 모두에게 하나의 이야기가. 그러니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세부 정보로 둘러싸인 존재. 그래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 한 사람에게서 시작하는 셈이었다. 이야기를 쓰겠다면 제일 먼저 바로 그 단 한사람을 생각하자.
말하지 않았던가? 서가에 꽂힌 책은 바닥에 쌓아봐야 진가가 드나러난다고. 서가에 꽂힌 책들은 이야기와 사상과 문장을 수록한 텍스트지만, 짐을 싸기 위해 바닥에 쌓으면 일순간 무겁기 짝이 없는 종이뭉치로 바뀐다. 하지만 집에 가서 서가에 꽂으면 다시 텍스트가 된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나는 부득불 그 종이뭉치를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맨 처음 할리우드의 이야기 공식, 그 다음은 소설가 앞에 놓인 두 개의 상지, '왜?'와 '어떻게?' 세번째는 빈도수 염력사전, 그리고 마침내 오늘은 인과와 사슬만들기다 소설에서 모든 문장은 사슬의 형태로 이어진다.
핍진성의 관점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는 제외한다. 인물의 성격뿐만 아니라 사건도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진행한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디에 사람들이 하는 행동에는 보편적인 패턴이 있다. 여기에도 물론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소설에서는 무의미하다. 현실과 마찬가지로 소설 속의 인물들도 인과의 사슬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아요."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핍진한 문장보다 구체적인 문장이 좋아요'로 이해한다. 물론 구체적인 문장만 해도 대단하다. 하지만 소설가에게는 구체적인 문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이해해주기를. 지금 나는 허구의 세계를 문장으로 창조해서 실제 감동을 주려고 하기 떄문이다. 소설에 푹빠진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허구가 아니다. 그게 다 핍진한 문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캐릭터를 만들고 플롯을 짜는가가 모두 이 핍진성에 기초한다. 여기가지 이해했으면 이제 소설가의 일은 서론이 끝난 셈이다.
제 2부 플롯과 캐릭터 : 소설에 빠져드는 이유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누군가 고민할 때, 나는 무조건 해보라고 권하는 편이다. 외부의 사건이 이끄는 삶보다는 자신의 내면이 이끄는 삶이 훨씬 행복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심리적 변화의 곡선을 지나온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 그러니 일단 써보자. 다리가 불탈 때까지 서보자. 그로고 나서 계속 쓸 것인지 말것인지 결정하자.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하고 싶다면, 일단 해보자. 해보고 나면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달라져 있을 테니까. 결과가 아니라 그 변화에 집중하는 것. 여기에 핵심이 있다.
"아침부터 빵 터져 버렸네."
모든 플롯은 어떤 행동/액션에서 시작한다. 이야기 작법에서 행동은 이렇게 정의된다. 주인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뭔가를 할 때 일어나는 것. 모든 게 갖춰진 사람들은 행동할 필요가 없다. 원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갖지 못한 사람들. 이루지 못한 사람들. 빼앗긴 사람들만이 행동할 수 있다.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뭔가를 원할 때, 우리가 원하는 그것은 바로 우리 손에 들어 올까? 살아본 바에 따르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 원하면 원할수록 가지기도, 이루기도, 되찾기도 어렵다.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태어난 우주는 그런 식으로 생겨먹었다. 모근 성현들이 욕망에 집착하는 건 생고생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시는 까닭이 다 여기에 있다.
멋진 표현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좋은 소설이라면 욕망을 감추는 그 문장 자체가 이처럼 기발하고 멋져야 한다. 가장 수준이 낮은 게 남편에게 "네가 미워 죽겠어!"라고 직접 말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남편이 미워 죽겠어!"라고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가장 좋은 건 역시 그런 마음속 일일랑은 일절 내뱉지 않는 것이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짓이 바로 그의 세계관이다. 다시 말해서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직이 바뀌면 그의 세계관도 바뀐다. 신경가소성이 뜻하는 게 바로 이것이다. 생각만 바뀌는 건 무의미하다. 말과 행동과 표정과 몸짓이 바뀌어야 한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노인도 마찬가지로 변한다. 소설을 펼치면 헤밍웨이는 그를 '살라오.' 즉 마침내 불행 가운데에서도 가장 끔찍한 불행에 처한 재수없는 사람으로 묘사한 게 보인다. 84일 동안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한 노인이기 때문이다.
생고생의 본질은 주인공을 변화시키는 데 있기 떄문이다 생고생의 결과, 원하는 것을 얻는다면 해피엔딩, 못 얻는다면 새드엔딩이다. 하지만 그게 어떤 엔딩이든 주인공의변화는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비극이란 주인공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끝나는 이야기를 뜻하는 것이지. 비관적인 결론으로 끝나는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반드시 불행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내 칼은 부러지고 말았어. 고기는 쓰레기 꼴로 뼈만 남았고. 새드엔딩. 그런데도 이 소설은 전혀 비관적이지도 불행하지도 않다. 여기에 인생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인생의 묘미를 이끄는 근본적인 힘은 바로 성격의 형성이다. 굴복하지 않는 모든 시련은 우리를 원하는 사람으로 만들어준다는 것. 성격의 형성이란 바로 그런 뜻이다.
이윤기 선생은 제도 교육에 회의를 느끼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독학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은 한편으로는 고독의 길이기도 했다. 독학의 길을 걸었다. 그 길은 한편으로는 고독의 길이기도 했다. 그날도 말씀하기길, 한번 인생의 트랙에서 벗어난 뒤로 다시 그 트랙에 올라갈 수 없게 됐다고. 그 말씀이 어찌나 슬프게 드리던지. 살아오면서 선생이 보낸 혹독한 겨울들은 나는 아무리 해도 상상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겨울을 보낸 자는 제아무리 밋밋한 봄이라고 찬란하게 누릴 수 있다는 진실을 선생은 삶에서 배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이란 매 순간 상황과 사건에서 설득의 매개와 근거를 찾아내는 발견술이라고 썼다. '발견술'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든다. 한글 자모를 조합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표현의 숫자는 무한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아직 조합되지 않은 표현을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보자면 작가는 '이를테면' 언어의 발견술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 3부 문장과 시점 : 내가 소설이 좋은 이유
내 서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한 부분은 읽은 소설, 또 한 부분은 읽은 비소설, 나머지는 읽지 않은 책들이다. 읽은 책들은 내가 보기에 좋은 순서대로 꽂는다. 그러니까 제일 좋은 책이 맨 낲에 있고, 뒤를 이어서 그다음 좋은 순서대로 책들이 쭉 꽂힌다. 물론 판단은 주관적이다. 그렇게 해서 평생에 걸쳐서 소설 365권과 비소설 365권을 선정한 뒤 일흔 살이 지나면 매일 한 권의 소설과 한 권의 비소설을 읽으면서 지내고싶다. 그러니 내 노후대책이라면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730권의 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소설을 계속 쓰면 쓸수록 행동하는 것, 말하는 것, 쓰는 것 등.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 그 자체가 중요하지.
말하자면 소설가는 텍스트의 디자이너이다. 방금 쓴 문장이 소설의 문장이라고 한다면, '덱스트의' 다음에 '디자이너'라는 단어가 이어기제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소설가다.
소설가란 자모를 배열해서 어떤 느낌이나 감정, 더 정확하게는 괘감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 때의 쾌감은 내용에서 비롯하는 게 아니라 자모 배열, 그러니까 덱스트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문장만을 쓴다. 글을 쓰기 위해 앉을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좋다.
인생문제의 대부분은, 자꾸만 과거 속에서 살려고 하거나,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거나, 미래를 알려고 할 때 일어나니까. 그중에서도 문제의 근원은 자신이 지금이나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뭘 안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미래에 대해서는 오직 모를 일이다. 현재 역시 모르기는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살 수는 있다. 과거는 다사 살 수 없는 대신에 알긴 안다. 하지만 이 안다는 건 지금이나 미래에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다. 그럼에도 지금이나 미래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다고 믿게 한다는 점에서 안다는 건 우리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속임수다.
자기가 쓰는 문장이 소설에 합당한 문장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맡고 귀로 듣고입으로 맛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단어들로 이뤄졌다면 소설 문장을 쓰고 있다.
내가 소설을 쓰고 싶거나 소설가가 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소설을 즐겨 있는 독자로서 소설을 쓰는 사람을 좀더 알고 싶어서 그랬을 뿐이다. 여전히 소설이 어덯게 쓰여지는 것인지 모르지만 소설가란 <사람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인간>임에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에 가 닿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하려고, 가 닿으려고 노력할 때, 그때 우리의 노력은 우리의 영혼에 새로운 문장을 쓰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소설가들은 이런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 것이겠지. 소설을 써주는 모든 소설가들에게 감사하며 계속 소설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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