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 (2015). 읽다 read 讀, 문학동네.
1. 위험한 읽기 : 독서를 하는 이유
독서를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라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겁니다. 저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프스왕]을 읽으며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우리가 고대로부터 매우 발전했다고 믿는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하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헤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
2. 우리를 미치게 하는 책들 : ???
뇌과학자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뇌'는 현실과 환상을 분명히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현실은 아련한 꿈처럼 기억되고, 어떤 이야기는 마치 직접 겪은 일처럼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야기와 비슷한 것으로는 꿈이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야기와 다릅니다. 어제 꾼 꿈을 오늘 정확히 이어서 꾸지는 못하니까요. 그런데 소설은 꿈만큼이나 생생한데 계속 이어집니다.
어쨌튼 책을 펼치면 순식간에 '지금, 여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휙 빨려들어간다는 게 마치 무슨 마법처럼 느껴져서 신기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힌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3. 책 속에는 길이 없다 : 길을 생각하게 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헤매기 위해서일 겁니다. 분명한 목표라는 게 실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이상한 세계에서 어슬렁거리기 위해서입니다. 소설은 세심하게 설계된 정신의 미로입니다. 그것은 성으로 향하는 K의 여정과 닮았습니다. 저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성을 향해 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우리는 쉽게 그 성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대신 낯선 인물들을 만나고 어이없는 일을 겪습니다.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을 경험하기도 하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를 곰곰히 짚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서점 서가에 꽂힌 수많은 책들 중에서 우리가 소설을 집어드는 이유는 고속도록 달리는 것에 싫증이 난 운전자가 일부러 작은 지방도로로 접어드는 이유와 비슷합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의 이성은 줄고리를 예측하고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인물의 성격을 우리가 알고있는 현실의 누군가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반면 우리의 감성은 작가가 써놓은 적확하고 아름다운 문장에 탄복하기도 하고, 예리한 인물묘사에 공감하기도 하고, 주인공이 처한 고난에 가슴 아파하기도 합니다. 이성과 감성이 적절히 균형을 이룰 떄, 우리의 독서는 만족스러운 경험이 됩니다.
그러므로 좋은 독서란 한 편의 소설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가가 만들어놓은 정신의 미로에서 기분좋게 헤매는 경험입니다.
한편의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얇은 세계가 우리 내면에 겹쳐집니다. 저는 인간의 내면이란 크레페 케이크와 같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상이라는 무미건조한 세계 위에 독서와 같은 정신적 경험들이 차곡차곡 겹을 이루며 쌓이면서 개개인마다 고유한 내면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4. '거기 소설이 있으니까' 읽는다
장례를 치르자마자 여자친구와 해변에서 노닥거리고, 햇볕이 눈이 부시다며 사람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고, 전당포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도끼로 살해한 후에도 참회하지 않는 인물의 행동을 지켜보는 이유는 나보코프와 카뮈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쓴 그 작품들에 우리가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들은 우리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완독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어떤 책들은 독자와 힘겨루기를 합니다. 그 책들을 읽고나면 독자의 자아는 읽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이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인물과 생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런 인물과 사상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독서를 통해 우리가 어렵사리 지켜오던 자아의 일부가 분열됩니다. 그리고 재구축됩니다. 소설이라는 자연을 탐험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마냥 재미나고 즐거운 일만은 아닌 겁니다. 위대한 작품들은 자아의 일부를 지불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자, 근육량을 늘리고 건강해지기 위해 헬스클럽에 가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과 세계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자'고 결심하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습니다. 소설은 소설이 가진 매력 때문에 다가가게 되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과 싸우며 읽어나가는 것이고,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독서의 목적 같은 것으로 설명해버리기에는 소설을 읽으며 독자가 겪는 경험의 깊이와 폭이 너무 넓고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5. 매력적인 괴물들의 세계
소설의 역사는 괴물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실험실에서 태어난 인조인간과 여인의 피를 빨아먹는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백작이 그러하고, 자신을 입양한 집안에 철저하게 복수하고 파멸시켜버리는 히스클리프 또한 그러합니다. 토머스 해리스가 1988년에 발표한 스릴러 소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 역시 도덕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연쇄살인범이지만 문학적으로는 잊을 수 없는 괴물이 분명합니다.
소설 문학의 세계는 일상적 세계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들을 경험하기 위해 책장을 펼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잡하게 나쁜' 사람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이 타인에 대해 갖는 공포심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이 나에 대해 적대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진화해 왔다, 또는 그런 두려움을 잊지 않은 유전자만이 지금까지 진화해왔다고 설명합니다. 저는 그말에 동의합니ㅏ.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소설 문학의 존재 의의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은 바로 그런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라는 백도어를 이횽해 침입한 바이러스와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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