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경(2014). 저녁이 깊다. 문학과 지성사.
2024-22
4/26~
길고 길었던 평가 준비. 현장평가가 끝나고 나니 시간의 여백이 돌아왔다. 책을 읽을 여유가 생겼다. 아침독서를 찾고, 틈새독서를 찾는다.
와!! 재밌다. 시작부터 국민교육헌장이 나온다. 완전 우리 때 얘기. 훅 들어가는 느낌이다. 시골 교실에서나 가능한 표현인데 무척 흥미롭다.
애국가나 교가처럼 가락이 붙은 것도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단어들은 큰비에 흙이 씻겨나가며 문득 제 모양새를 드러낸 산길의 돌처럼 험악하고 묵직했다. 엎친데 덮친다고, 자루에서 솓아진 콩이나 다름없이 비슷비슷하고 엄숙한 단어들이 이어졌다(12쪽) --> 여기서 나도 크게 공감했다. 초등학생이 미처 알기 어려운 단어들의 나열인 헌장을 외우고 또 외우고 검사받고 하는 동안 멜로디가 만들어져 지금도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말이 되었다는 전설^^
국민교육헌장, 육성회비, 버스 안내양, 타이밍 등. 왜 지난 것들은 그리움인지 모르겠다. 고통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고통은 잊고 그리움만 남는지.
국민학교 6학년 나 기주는 종희, 선옥, 정구, 형태, 병묵 등과 학교를 다닌다. 전학생 지표도 함께. 시골 초등학교에서 만난 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누군가는 대학을 가고 누군가는 직업을 찾고 결혼하고, 죽고 살아가는 길고 긴 여정을 촘촘하게 그린 이야기다. 읽는 동안 내가 이들의 삶과 비슷한 시절을 비슷하게 건너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소설의 끝에 선 이들보다 더 긴 시간 살고 있다. 소설 속 그들이 내가 선 이 순간까지 살아오는 과정도 궁금하다. 다만 다만 많이 아프지 않기를. 어긋나버린 길에서 헤매다 더욱 어긋나버려 결국 후회하게 되지 않기를 하는 마음이 남았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한다고 해서 똑같은 학생인 것은 아니다. 육성회비 때문에 이름이 불릴 때마다, 사람들 속에 묻혀 살다가 깊은 밤 똔똔거리는 무전기 소리로 정체가 발각난 간첩이 된 기분이다. 교실에서 내몰리는 순간, 교실문은 지진으로 쩍 벌어져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심연이 된다.(89쪽) --> 그랬구나. 육성회장 아버지를 둔 국민학교 시절을 보낸 나는 전혀 알지 못했던 그 시절의 단어. 육성회비. 어린 시절 이랬기 때문에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 난 갈팡질팡 하는 어리석고 무능한 청춘이었다. 한때 가난했다거나 부유했다는 것은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아니다. 내 앞의 생이 그러했듯.
병묵이 부유한 친척 형태 아버지 외당숙을 찾아갔다 어린 병묵은 당연히 거절당한다. 아버지란 사람을 핑게로.
병묵은 질겅질겅 씹던 강아지풀을 홱 내던졌다. "어쨌튼, 해볼 수 있는 데까지 다 해봤으니까 미련은 없어. 그래도 졸업하기 전까지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지. 그래야 공장이든 어디든 취업하기도 나을 거고." 몸을 일으키던 병묵이 문득이 문득 픽, 실소를 날렸다. "그 집 오렌지 주스, 참 망ㅅ있더라. 어떤 사람들은 맨날 그런 거 마시고 살 거 아냐. 꿈 깼으니 그만 가자." --> 슬프다.
지표는 홀로 힘들게 재수로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돈을 아끼기 위해 민호네 입주 과외를 한다. 사춘기 학생이 쉽게 따라 올리 없다.
"김민호, 이리와봐. 이걸 점수라고 받아와?"
민호는 고개를 축 스그린다. 책상 앞에 진득이 앉아 있지 못한다는 점만 때면 나무랄 대 없는 아이다.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뽑기를 잘한 아이, 천성인지 모날 일 없는 환경 덕분인지 착하고 순수하다. 지표가 몸살을 앓아 몸이 불덩이가 되었을 땐 물수건을 머리에 얹어주고, 체온으로 미적지근해진 물수건을 밤 내 찬물에 쥐어짜 갈아주기도 했다. 형, 형 하면서 따르는 민호의 귀염둥이 짓을 떠올리면 학교에서도 문듣 미소가 지어지곤 했다.(115쪽)
오전에 벌을 서고 오후엔 운동장에서 풀을 뽑았다. 어떤 풀은 뿌리가 얕아서 마른 땅인데도 기다렸다는 듯 쉽게 뽑히고, 또 어떤 풀은 악착같이 뿌리를 박고 있어서 결국 줄기만 뽑았다. 어디선가 바람 타고 날아온 풀씨들인데 어떤 풀씨는 뿌리가 얕고 어떤 풀씨는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사람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학교에선 공부를 잘하는 것만으로도 뿌리가 깊어질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간다면? 지표는 세상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싶었다. (1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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