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2025). 작은 일기, 창비.
2025-46
8/23~
8월 23일부터 3일간 서울을 다녀왔다. 여행의 무게를 책으로 채울 수 없어 부피가 가벼운 책을 골라 들고 갔다. 책의 물리적 부피에 비해 내용이 너무 무거워 다 읽지 못했다.
언제나 인상깊었던 작가 황정은. 그녀의 일기라고 했을 때 작가의 평범한 일상은 어떨지, 어떤 생각을 하고 무엇을 하고 어떤 책을 읽을지 궁금했고 기대했다. 작가의 일기는 지난해 12월 3일 내란의 그 밤으로부터 시작된다. 작가의 마음이 우리의 그것과 너무 닮아 깜짝 놀라고 있다. 여전히 완벽하게 회복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계엄의 흔적에 불안감이 내재된 내게 작가의 일기는 다시 악몽을 생각하게 하였다. 내게는 하늘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도 내란의 그날부터 체포와 탈출, 탄핵, 파면 등의 국면을 나와 똑같이 겪고 참여하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불안해했다는 것을 알고 반가웠고 아쉬웠다. 소설가로서 황정은의 일상이 평범한 날들의 기록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당신이 봤던 영화를 다시 봅니다. 당신이 읽었다고 하는 책 중 몇 권을 주문했습니다.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당신의 감성처럼 느낄 것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그간 당신의 소설을 보면서 내재된 나의 생각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추운 밤을 그 자리에서 보낸 사람들도 놀랍고, 그들에게 난방 버스며 음식이며, 바람 넘는 고개에서 버티는 데 도움이 되는 물품들을 즉시 보낸 사람들도 놀랍다. 그런 나라에서 받은 것이 없어도 위기가 닥치면 들불같이 일어난다는 어느 민족의 성격 같은 것이라기보다는 남의 곤경과 고립을 모르는 척 내버려 두거나 차마 두고 갈 수는 없는 마음들 아닐까. 남의 고통을 돌아보고, 서로 돌볼 줄 아는 마음들.(58쪽)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59쪽)
시력이 너무 떨어졌다. 넉달 사이에 시력 검사표에서 석줄이 흐릿해졌다. 시신경이 유의미하게 사라진 것은 아니고 근시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안경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 안경을 쓰고 책을 보면 글자는 더 또렸하게 보이지만 종이 결이나 글자를 둘러싼 작은 보푸라기들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미세한 것들이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사라진다. 종이를 같이 읽지 않는 독서는 내게 좀 허황하고 밋밋하고 서먹하다. 지면이 아닌 화면을 보는 것 같아서. 글자가 더 또렷하게 보이면 종이도 더 또렸하게 보여야 하지 않나? 영문을 모르겠다. 십 년 전 안경이라서일까?(107쪽)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모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 하루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풍경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112쪽)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영 탄핵 재판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국회 측 대리인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내게 무척 아름다웠다. "오염"이라는 말로 내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의 오염. 바로 그것을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한 말이 건네는 위안을 받았다.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118면)
서점지기로 일하는 문진영 작가를 만났다. 대화하다가 갑자기 '향긋하다'는 말을 들었고 그 말에 기뻐 날뛰었다. 누군가에게 잠시 향긋할 수 있다니 최고의 칭찬을 들은 것 같았다.(119면)
어느 것도 의미가 없으니 어느 것이나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내게도 익숙했다. 삶에는 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며 산 적이 내게도 있다. 지금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괜찮아지기 위해 삶을 의미 없음으로 고정하고 싶지 않다.(134쪽)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댓 원스(2002)]
새벽에 [세계숲(다이애나 베스스퍼드-크로거, 노승영 역, 2025, 아를]을 읽었다. "아무 것도 밖에 있지 않다(22면)" 그 말을 읽고 난 뒤엔 더 읽기가 어려원 한동안 책을 덮고 있었다. 기뻐서 심장이 뛰었다. 내용이며 만듦새며 모든 게 아름다워서, 아까웠다. 시신경이 마저 손상되어 이런 책을 더는 눈으로 읽을 수 없게 되면 너무 서그플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다. 기쁘고 아깝고. 독서가 어떻게 고요한 활동인가. 좋은 책을 만나면 너무나 난리다.(136면)
황정은이 이렇게 말한다. '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엄중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받은 상처로 사랑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남은 상처로 손상되었고 그 일부를 일기에 담았습니다. 지난 겨울과 봄은 나름으로 삶을 가꾸며 살아도 권한을 가진 몇 사람이 작정한다면 도리 없이 휩쓸리고 뒤흔들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 내가 그것이라는 것을 실감한 국면이자 계절이었습니다. 또한 나는 작아서 자주 무력했지만 다른 작음들 곁에서 작음의 위대함을 넘치게 경험한 날들이기 했습니다. 이 책을 만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국면을 함께 지나온 사람들, 여러분과 동시대에 살아 다행이었고 영광이었습니다.
다른 날 다른 때 우리가 또 서로를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191면 후기 중)
'가끔은 이렇게 > I Love BOOK^^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혼모노 (0) | 2025.09.04 |
|---|---|
| 8월 독서 정산 (0) | 2025.09.02 |
| 여름어 사전 (2) | 2025.08.18 |
| 범도 (5) | 2025.08.14 |
|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외 (6) | 2025.08.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