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햇살 와랑와랑^^

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프리즘

Jeeum 2025. 11. 21. 08:04

손원평(2020). 프리즘, 은행나무.

2025-65

11/19 ~ 11/23

 

고다 아야의 에세이 <나무>와 함께 장편소설을 읽는다. 도서관에서 대여해두고 밀쳐 둔 책들을 읽는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부지런히 내게 날아든 것들과 함께 한다. 함께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책이 있다는 것, 음악이 있다는 것, 붓이 있다는 것, 영화와 드라마가 있다는 것, 연필과 만년필, 공책이 있다는 것,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 베란다 가득 식물이 있다는 것, 저너머 편안한 풍경이 있다는 것... 참 좋은 일이다. 참 좋은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나.  

 


 

여름같은 (전)예진, 겨울같은 전직 라커, 영화 음향 편집자 (백)도원, 봄같은 이스트플라워베이커리의 (황)재인, 가을같은 아르바이트생 (이)호계. 네명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일을 하고 일상을 나누는 타인들이다. 네명의 청년들의 만남, 호감, 연애, 이별,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를 이루는 소설이다.

 

딱 적당한 거리-여름

 

여름에 시작해서 모든 계절을 거쳐 여름에 끝난다. 만남과 인연이 이루어지는 여름에는 딱 적당한 거리의 여름, 한여름, 초가을, 겨울의 습하고 진한 추위에 떤다. 봄이 그렇듯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른 봄을 지나 새로운 장소, 새로운 사람과의 시작이 가능할 것 같은 여름에서 끝이 난다. 

 

이나이의 내가 감히 공감이란 단어를 쓰기 어렵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내가 그랬을 듯한 열기, 달뜸, 품었을 직한 달콤함에 대한 기억, 열정, 허무, 후련함, 느닷없어 당황했었을 이별, 오해 등등이 세심한 문장으로 기술되어 주인공 모두 반빡반짝거렸다. 생각의 구덩이를 억지로 깊게 파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소설.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에 발을 딛고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을 모아 프리즘으로 통과시키면 작은 빛의 조각들이 모여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어줄 거 같은 그런 느낌의 이야기였다. 

 


 

첫 문장 

 

이 거리에는 사람이 많다. 참 많다. 너무 많다.

 

예진는 커피를 홀짝이며  생각한다. 투명한 텀블러 안에서 얼음들이 저들끼리 부딪혀 청량하면서도 몽롱한 소리를 낸다. 예진은 지금 건물 밖에 나와 있다. 부드러운 물결 모양의 차양이 내려진 모퉁이 건물, 계단이 건물 밖으로 비스듬히 나 있어 걸터 앉기도 좋고 1층이 비어 건물 안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칠 가능성도 없다. 행인들은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예진은 그들을 은밀히 관찰할 수 있는 작은 의미에서 전지적 시점이 가능한 곳이다. 사무실은 몇 블록쯤 떨어져 있지만 예진은 여기 서 있길 좋아한다. 처음엔 우연이었고 지금은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누군가'라는 강력하고 특별한 이유.(9쪽)    

 

 

정적 재인이 고개를 들었다. 순도 백퍼센트의 미소가 자신을 향해 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랑이 시작되려는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영원히 거둬질 것 같지 않은 라진씨의 미소를 보면 재인은 갑자기 엄청난 비밀을 깨달앆다. 자신이 빵을 좋아하는 이유를.창백하고 보잘것없는 덩어리가 따뜻하고 촉촉하게 부풀어오르는 게 좋아서였다. 아마도 처음부터 쭉, 그랬을 것이다. 그 사라으런 마법의 세계에 어떻게든 동참하고 싶어서.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 작은 감동에 목이 멘 채 재인은 겨우 입을 열었다.

"살찔 자신 있어요 나 설탕 많이 쓰는데."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그대의 모든 작품에 첫 시식을 할 수만 있다면."

재인은 웃었다. 단 몇 초 만에  라진 씨와 재인의 대화는 숙성됐다. 재인은 기뻐서 웃음을 빵 터트리고 말았다.

빵 하고 부풀어오르는 오븐 속의 빵처럼,(234)

  

 

마지막 문장

 

다시 깊은 내면에서 예진은 기다린다. 기대하고 고대한다. 갈망하고 염원한다. 아름다워도 상처받아도, 아파서 후회해도 사랑이란 건 멈취지지 않느낟. 사랑의 속성이 있다면 시작한다는 것, 끝난다는 것, 불타오르고 희미해져 꺼진다는 것, 그리고 또다시 다른 얼굴로 시작된다는 것. 그 끊임없는 사이클을 살아있는 내내 오간다는 것.

그렇게 원치 않든 사랑은 계속된다. 뜨거운 도시의 거리 위에서 한겨울에도 늘 여름인 마음 속에서  태양이 녹아 없어질 때까지, 우주가 점이 되어 소멸하는 그날까지.(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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