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하지만 햇살 와랑와랑^^

가끔은 이렇게/I Love BOOK^^

희망

Jeeum 2026. 2. 23. 18:25

2026-9

양귀자(2020). 희망 5판, 쓰다.

2/23 저녁 ~ 3/10 아침

 

양귀자(1990). 잘 가라 밤이여

양귀자(1991). 희망

양귀자(1996). 희망 3판 

 

시대의 배경은 바뀌어도 삶은 남는다. 그렇기에 우리 각자가 품은 '희망'들은 여전히 유효하다. (양귀자, 작가의 말 4)

 

598쪽의 긴 소설 읽기를 오늘 아침에 마친다. 총 10장의 시작은 '나성여관'이고, 마지막은 '눈꽃'이다. 1980년대 우리가 살았던 나성여관을 시작으로 그곳에 살았던 머물렀던 이웃들의 이야기가 있다. 1980년대는 개발의 시대였다. 소설은 개발을 벗어나지 못한 헐벗은 나성여관이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곳에 살던 가족이 그곳을 떠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희망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화자인 스무살 3 수생의 우연이 시선에 서있는 자신의 집 나성여관. 부모, 형, 누나, 10호실 할아버지와 민구, 찌르레기 아저씨, 뽕짝아줌마 등등. 우연과 비슷한 연배인 내가 살았던 시절을 꼭 닮은 이야기였기에 지루한 읽기를 멈추지 않고 가능한 하루에 한 장씩 읽으려 노력했었다. 소설을 읽는 동안 한 장의 처음과 끝을 필사하면서 나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나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우연은 포기했던 대학에서 희망을 보고자 남몰래 애태웠던 내가 매일매일 기록했던 이야기들. 이십 대의 내가 불안을 감추며 했던 우정, 사랑, 관심들. 우연이 형에나 누나에게 그리고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들이 그리워하는 것들이 아쉬워하는 것들이 나의 지난 기억을 조금씩 깨워주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심해진 아침 두통으로 무거운 머리를 이고,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몰입하게 되고 두개골의 통증이 사라지면서 가벼워지는 느낌을 경험하곤 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그리고 나도 돌아섰다. 생각없이 골목 안으로 몇 발짝 걸음을 옮기다 말고 나는 우뚝 서버렸다. 바들이 서로의 맨몸을 부비며 칭얼거리고 있을 나성여관은 이제 내가 돌아갈 곳이 아니었다. 나는 망연해져서 낯익은 주변 형상 하나하나에 스며있는 시간의 부스러기들을 보았다. 그 멈춘 시간 속에서 나는 공기조차 떨지 않는 고요를 보았다. 그러나 그 고요를, 이루 말할 수 없이 평온했던 순간의 고요를, 휘몰아쳐 내달려온 바람이 일시에 헝클어버렸다.

 

다시 되돌아 나오다 나는 바로 옆에서, 제대로 풀칠이 되지 않아 깃발처럼 나부끼는 전봇대의 광고지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누더기같이 덕지덕지 붙은 다른 광고지에 비해 최근의 것인 듯 가장 깨끗하게 보였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생산직 남녀사원 00명 모집. 초보자 환영, 깃발같이 펄럭였던 그것은 구인광고였고, 내가 읽은 것은 그 두 문장과 전화번호였다. 

 

 

시간은 앞으로만 달린다. 지나온 시간이 어떠했건 지난 것은 지난 것이다. 나성여관의 시절은 지났다. 우연의 시간도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돌아서야 한다. 가끔 되돌아볼지언정 돌아서야 끝나고 돌아서야 시작한다. 그것이 희망의 법칙이다.

 

스무 살의 희망은 전봇대에 붙은 구직광고에서 출발할지도 모른다. 대학진학을 포기는 우연이 산업현장으로 노동자의 삶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 우연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새로운 시간을 살게 될 거야. 그 속에서 우연도 건강하시길......

'가끔은 이렇게 > I Love BOOK^^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자전  (1) 2026.03.14
안녕이라 그랬어  (0) 2026.03.10
천 개의 파랑  (0) 2026.02.21
한 명  (0) 2026.02.10
직지 아모르 마네트  (0) 2026.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