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나의 언어

walking, again.

Jeeum 2021. 3. 13. 08:52

토요일 아침.

 

어제는 종일 비가 내렸다. 이 비가 그치면 돌연 봄이 올 것이다.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고, 여린 풀들의 키가 부쩍 자라나서 지금이라는 세상의 색깔이 바뀔 것이다.

 

쓰레기 봉투를 들고, 오랜만에 운동화를 신고 나섰다. 동변동 현재 온도 '4도' 혹시나 추우면 어쩌나, 바람이라도 거칠면 그냥 들어오자라고 생각했다. 아파트 건물을 나서자마자 처음 만난 공기는 생각보다 훈훈했다. 춥지도 거칠지도 않고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었다.

 

걷기 시작했다. 습관대로, 관성이 시키는 대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어젯밤. 펑펑 울었다. TV 채널을 돌리다 느닷없이 부모라는 이름에 부딪쳤다. 화면을 고정시키고 보았다. 거기에 나의 엄마를 닮은 부모들이 있고, 그들을 닮은 자식들이 애닮은 눈동자로 부모를 어루만지고 바라보고 있었다. 3시 방향에 놓인 엄마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고운 분홍빛 한복을 입은 나의 엄마. 갑자기 공간이 휑하고 쓸쓸해졌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말았다. 어젯밤의 기억은 퉁퉁 부은 얼굴의 아침을 선물로 주었다.

 

맨살에 닿는 시원하고 부드러운 공기가 부은 얼굴과 눈두덩이를 압축시켜 제자리로 돌려줄 것 같았다.  금호강이 보이는 강가로 나섰다. 어제 내린 비 때문일까 강물이 부풀어 오른 듯 강 수면이 넉넉하게 높아져 있었다. 봄이 주는 풍요로움이 이런 것일까? 눈에 거슬리던 고속도로 교각에 걸려있던 꺾인 나무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편안해졌다. 뭔가 가득 차오른 듯한 느낌이다. 어느새 자란 잡풀들 사이로 낚싯대를 둘러멘 사나이가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긴 겨울의 휴식을 마치고 이제 자신의 욕구를 찾아가는 모습이 당당하다. 새들이 많아졌다. 바람이 거칠던 겨울에 옹기종기 가족을 이루어 다니던 오리들이 많아졌다. 오리의 모습도 지금의 기온을 닮은 듯 느긋하다.

 

동화 천변에 닿았다. 잿빛 그리고 새하얀 구름빛의 학 두 마리가 날개를 펼쳐 날아오른다. 잠시 타원을 그리며 낮게 날다 다시 사뿐히 가붓하게 내려앉는다. 겨울 산책길에 가끔 보기는 했으나 왠지 추위에 움추러 든 것 같았다. 겨울을 나는 동안 날개가 자란 듯 넓게 펼친 자태 아래 진 그늘이 크다. 겨울은 이렇게 부지런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새를 보면 언제나 엄마를 떠올린다. 엄마가 새처럼 자유롭게 멀리 날아서 하고픈대로 세상을 돌아다녔으면 하는 부질없는 생각 때문이다. 멀미가 심해서 차 타기를 싫어했던 우리 엄마, 치매로 진단받고 3년째 고관절이 부러지고 이듬해에는 나머지 한편의 다리 마저 부러져 떠나는 날까지 걷는 것마저 불편했던 내 엄마. 그런 엄마였기에 새가 되어 자유롭게 훨훨 다니기를 소망해 보는 것이다.

 

새를 뒤로 하면서 말했다.

 

"엄마. 안녕. 오늘도 좋은 날이길~~ 멀리멀리 다녀오길. 엄마가 다니는 길에 행복한 얘기들이 가득하길~~"

 

물 흐르는 소리가 커졌다.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 무엇이든 어딘가를 향해 부지런히 자신의 존재감을 뿜어낼 때 나는 소리에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오늘 내가 듣는 물소리에는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자신감이 담겨있다. 가끔 여린 소리를 내기 시작한 물소리보다 오가는 자동차에서 나는 소리가 더욱 크다. 못마땅하다. 봄기운 가득 담아 다시 흐르기 시작한 망울망울 물들에게 에너지를 보태주고싶다. 

 

팔공산 쪽을 향해 걸으니 바람이 조금 강하다. 겨울에는 더욱 그랬다.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려본다. 역시 바람을 등지는 것이 편하다. 그럴 때마다 걸어가는 방향을 바꾸고 싶다는 충동이 생겨나곤 했다. 하지만 그냥 걷는다.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더 거세다고 피해갈 나이는 아직 아니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대로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일 뿐. 그 바람 속으로 걸어가는 것도 내가 선택한 내 삶의 방향. 그렇기 때문에 기꺼이 웃으며, 그 바람 속으로 걸어 나간다. 속도는 늦어도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면 어느새 바람은 등 뒤로 스쳐 지나가고 있다.

 

한참을 걷다 징검다리를 건너 왔던 길로 되돌아 간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이제 집으로 가면 토요일 아침 걸으면서 했던 온갖 생각들을 잊어버릴 것이다. 밥을 먹고, 청소를 하고, 느긋하게 토요일 출근을 준비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도 조금 지난 훗날 행복한 때로 소환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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