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입으로 내뱉어 버리는 습관은 그녀가 고치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수많은 관계 속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 굳이 깊이 생각까지 하면서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말을 내뱉는 속도는 무엇과 관계된 것일까? 생각, 성격, 나이......
아침 독서를 하다 이 문장에서 멈추었다. 서른 살의 '민아'가 '준호'를 처음 만난 날, 토요일 저녁 복잡한 레스토랑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쉽게 뱉은 자신의 말을 후회하며 이렇게 생각했다.
서른 살의 여성이 이런 생각을 하기란 쉽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른 살은 여전히 자신이 우선인 나이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많고, 무엇인가 열심히 해야 하는 절박함이 큰 시기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큼 잘할 수 있는 것은 적은 시기이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빈틈이 생기면 오히려 목소리는 커지고, 말을 내지르는 속도는 빨라진다. 가족 간에도 친구 사이에도 연인에게도 지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순간적으로 내지르는 말을 또박또박 유창하게 할 수 있는 생리적 건강 상태가 왕성한 것도 한몫을 한다.
나이는 공평하게 매년 살이 찐다. 숫자가 주는 무게감은 날마다 커진다. 커진다고 많아진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다. 가끔 약국 봉투에서나 존재하여 잊어버렸던 스스로의 나이를 인식하며 산다. 그럴 때마다 살짝 등짝이 서늘하기는 하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봤을 때 말을 내뱉는 타이밍은 나이의 크기를 나타내는 숫자에 반비례하는 것 같다.
젊은 날에는 순간순간 드는 감정을 추스르려 하지 않는다. 일단 그냥 내지르는 일이 많다. 생각보다 말을 하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할 말도 꽤 많다. 그것이 존재감이고, 자존심이라고 믿는다.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는 하나 싶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말을 한다.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생각 없이 빠른 말이 또박또박 정확하고 설득력 있기는 어렵다는 것을 금방 안다. 하지만 젊은 날에는 일단 내질러야 속이 편하다. 그렇게 말을 내뱉고 있는 순간 스스로가 얼마나 얄팍해 보이는지 그때는 알지 못한다.
물론 나이를 먹는다고 다 생각하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하는 말의 속도를 적절히 통제하고, 해야 할 말의 내용을 되새기고, 적어도 한 번쯤은 걸러 후회가 적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경험은 사람의 많은 것을 바꾼다. 그래서 어린 청소년보다는 중년이나 노인은 말을 함부로 내지르지 않는다. 속도가 무겁고 신중하다.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잘못된 말로 난감해져 본 경험이 상대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소극적이 되고 자신이 없어져서 그리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잇값을 못한다.'라고 표현이 그냥 나왔으리는 없다.
가끔 나는 '지금(now)'을 건너가면서 타인의 언어를 듣다가 오히려 마음을 닫게 되는 일이 왕왕 있다.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혹은 천천히 말을 하는 것이, 하고픈 말을 누르는 것이 오히려 나를 설득한다고 느끼는 일이 자주 있다. 보고서나 경위서를 쓰는 것처럼 일일이 자신을 설명하지 않는 것이 상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도 자주 경험한다. 물론 입을 닫는 것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기도 하니까. 말을 하지 않으면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도 많으니까.
이론이나 실습 수업시간에도 나는 같은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하고픈 말의 절반도 실제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전히 내가 많은 말을 한다고 느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말에 굳이 공감하려 하지 않는 세대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은 어렵다. 조심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생리적 신체적 건강도 자연스레 약해진다. 그래서 많은 일을 하거나 생각을 하면 힘에 부친다. 나이든 사람의 입이 무거워지는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실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누구나 똑같이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상태를 잘 이해하고,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알맞은 삶의 방식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표현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나의 귀는 예민한 편이다. 오랜동안 해왔던 내 일이 만들어 준 결과이다. 그러나 이제 타인에게만 민감했던 감각과 지각력을 이제 나 자신에게 돌려야 할 때가 되었다. 타인의 언어에 관대해지고, 나 자신의 언어는 좀 더 섬세해져야 한다. 그래야 누추해지지 않을 수 있다. 이 또한 지금 해야 할 숙제인가 보다.
나는 오늘도 문학 작품 속에서 걸어가야할 방향을 본다. 이것이 아침에 하는 짧은 시간의 책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이다.